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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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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트바 작성일19-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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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느 동영상에서 마음은 통찰력에 의해서 본래의 실상이 드러난다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유란시아 책에서 말하는 통찰력을 마음이 체득한 정점이라는 의미라고 이해할 때, 유상계와 무상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실체는 한편으로 반야에 이르는 정심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반야는 물질과 현상의 제반 양상을 받아들이면서 그러한 것들이 유래하고 귀결되는 법의 참된 본성을 원래 그대로 깨닫는 지혜라서, 마음을 가다듬는 사람들에게는 궁극의 진리를 인식한 실체적 경지입니다. 반야는 말로 할 수 없는 깊고 심오한 깨우침이자 통찰이라서, 말이나 글로 설명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옛 선사들은 깨달음에 대한 어떤 물음에도, 직언대신 호통을 지르기도 했던 것입니다.

 

유란시아 책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진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만, 특히 마음과 그 기능 이아 궁극의 깨달음에 관련되는 계시는 그동안 인간이 이룩한 깨달음과 지혜가, 반야를 외치면서 정진했던 수 천년 세월의 선인들의 진리가 왜 우리를 더 이상 성장시키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자각하도록 만듭니다.

 

매 문단마다 담긴 진리는, 만약 계시가 없었다면 과연 인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새삼 깨닫게 만듭니다. 지금도 여전히 옛 종교적 진리를 무한한 보물이 담긴 신비로 여기면서 끊임없이 보물을 찾아 나서는 전통 종교와 진리에 매달리며 탐구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게 됩니다.

 

계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내려줍니다. 유란시아 계시도 인류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내려준 것은 틀림이 없지만,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이 이해할 수준이 아니라, 천년 후에 살아가는 인류가 이해하는 수준입니다.

 

30 :0.2

대우주의 개인성들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전적으로 일관된 분류표를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그 집단들이 모두 계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집단들을 조직적으로 분류하는 데에 요구되는 더 많은 계시를 다루는 일은 셀 수 없이 많은 추가적 글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한 개념적 확대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데, 이것은 부분적으로 계시된 이 개념들이 공급하는 자극, 창조적 추측을 일으키는 자극을 다음 천년 동안, 생각하는 필사자들로부터 빼앗을 것이다. 과도한 계시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것이 상상력을 억누른다.

 

물론 지금의 우리가 전혀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완벽한 이해는 우리의 당대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암시합니다. 그렇다고 계시자들이 인간의 이해력을 무시하거나, 일부러 무엇을 감추어서 인간의 창조력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앞으로 천년 동안 진보할 사람의 생각은 미 계시된 우주 실체에 대한 추측과 도전에서 동기가 부여된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도전하는 대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인들이 깨달았으나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던 감추어진 비밀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인간에게도 전혀 밝혀진 적이 없는 비밀에 대한 도전입니다.

 

현존하는 모든 종교와 철학과 지혜는 나아가 반야의 경지마저도 누군가 깨달았으나 후대에 전할 수 없었던 감추어진 비밀의 영역입니다. 계시자들은 인간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와 비밀을 알고 있겠지만, 천년 동안 인류가 정진하고 정복할 한도 내에서 계시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깨닫는 지혜와 통찰력을 모두 합하여 백 년 후 천년 후에 어떻게 이해될지 분별심을 내어 본다면, 팽팽한 아상이 계시자들의 미소 안에서 자유를 찾고 끝남이 없는 또 다른 정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힘차게 진리를 외치지만 지극한 행복을 위한 진리가 많습니다. 완전무결한 자아를 실현하고 그 결과로 우주적인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존재로 우뚝 서는 것은 루시퍼가 주장한 진리인데도, 그런 목적으로 열심히 유란시아 책을 읽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끼리끼리 모여 그룹을 만들면서 서로 상대방의 존재감을 확인해 주면서, 위로를 주고 한편 위로를 받으면서 진리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삶에서 서로 감동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존재의 기쁨을 맛보기도 하겠지만, 현세적인 감동이라면 참된 의미와 가치는 없습니다. 존재가 사라지면 모든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계시가 주는 목적이 "창조적 추측"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자극을 받아 창조적 활동을 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마음이나 지성이나 지혜는 창조라기보다는, 어떤 반응이자 통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바탕에서 창조적인 활동이 시작되어야만 하겠지요.

꼴라쥬님의 댓글

꼴라쥬 작성일

좋은 글들을 읽게 되어 새삼 마음이 밝아지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최경곤님의 기도에 대한 글을 읽고 사트바님의 깨우침에 관한 글을 연이어 읽으면서 계시서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정말로 개인마다 무언가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혜로 표현되는 마음의 통찰력은 기도와는 많이 다른 주제라서, 같은 선상에서 이해한다는 것이 있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명상이나 마음수련과 하느님에 대한 기도는 겉모습도 그렇고 내면의 마음 상태도 의식도 아주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유란시아 계시가 궁극의 지혜를 깨우치도록 이끄는 것이라면 기도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좋은 말씀 잘 읽었습니다.

사트바님의 댓글

사트바댓글의 댓글 작성일

명상과 기도는 다르지만 상충하는 게 아니고 꼭 있어야 합니다. 이 책에서는 올바른 각성을 사실, 의미, 가치로 나누면서, 시공간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임을 계시합니다. 일시적인 현세와 궁극에는 시간적인 일체와 공간적인 일점을 알려줍니다.

명상을 통하여 유한 실체가 무한에 견주어 찰나 생-찰나멸임을 깨닫기도 합니다. 무한을 인식할 수 없으면서 단지 생각과 이성으로 무한을 정의하는 것이라서 공허한 것 같지만, 인간의 힘으로 생각의 끝까지 달려가서 초유한 실체를 만나려 애쓴다는 의미는 의미는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현세의 아상을 해체하는 것이지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가능하다면 참된 아상을 구축하는 길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기도는 현세적 의미와 가치보다는 신앙을 바탕으로 미래의 실체를 확인한다는 점에서, 명상과는 뿌리가 다르다고 봅니다. 다만 자각이 없이 소망이 나올 수 없듯이, 존재자와 체험자를 밝혀 준 이 책의 진리에서, 명상이나 기도는 필사자의 영적 삶이나 현세적 완성에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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