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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의 찰나와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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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트바 작성일19-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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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에 불교는 불-법-승의 삼귀의를 외우기만 하면 신자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경전의 용어가 아니라 낯설지만, 본래의 의미가 계시되었다고 봐야겠지요.

94:8.1
 
불교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귀의(歸依)의 말을 낭송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부처 안에 귀의합니다; 나는 신조 안에 귀의합니다; 나는 형제신분 안에 귀의합니다.”
94:8.2
 
불교는 신화에서 기원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에서 기원되었다. 고타마의 추종자들은 그를 사스타라고 불렀는데, 주(主) 또는 선생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또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아무런 초인간적 주장을 하지 않은 반면, 그의 제자들은 일찍부터 그를 부처, 깨우친 자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석가모니 부처라고 불렀다.

 

삼귀의는 불교 초기에 깨우침을 따라오기 힘든 일반 대중을 위한 배려였지요. 요즘도 생활 속에서 외우는 말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첫 번째 귀의인 불귀의를 낭송합니다.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도 첫 번째만은 고백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부처님에게 귀의한다는 포괄적인 의미가 구체화되어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님에 귀의로 말하는 것을, 세분화로 볼 수도 있고, 성장하는 의식의 실체화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해탈과 열반을 구하는 불자들은 귀의의 계송 자체를 벗어나는 경지를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첫 번째 귀의가 주는 내용이나 의미를 크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삼귀의는 이제 내가 나아간다는 선언적 의미를 여전히 담고 있기 때문에 하나도 가볍게 볼 수는 없습니다. 어느 장소 어느 때나 불자들에게는 삼귀의 계송이 몸과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는 관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 신자가 되는 조건이 이렇게 간단해 보이지만, 두 번째 귀의인 귀의법은 고단한 삶을 한 순간에 사라지게 하는 위로의 진리가 되기도 합니다만, 열반에 이르는 길고도 힘든 깨달음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인 귀의승은 깨달음의 여정에서, 진리를 끊임없이 계승하고 확대하는 승에 귀의한다는 선언이기도 하지만, 해석에 따라 의견이 분분합니다. 승을 스님이라 해석하기도 하고, 절이라는 말하기도 하고, 깨달음을 구하는 사부대중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해석을 두고 서로 싸우기도 합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승을 형제신분으로 계시하고 있어서, 일단은 사부대중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싸우는 일을 하나 더 말한다면, 깨달음이 이르는 두 가지 길인 점오와 점수입니다. 승에 대한 다툼보다 심각한 문제라서, 심하면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도 않습니다. 점오는 찰나에서 영원으로 나아가자는 설법이고 점수는 영원과 찰나가 하나인데 나아간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하는 식이지요. 공간 안에 존재를 올바르게 깨달아 공간을 벗어나고자 하고, 하나는 존재 안에 있는 공간을 깨달아 공간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공간은 인간이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공간이 있어야 존재가 존재하고 한편 존재가 있어야 공간이 실재한다고 정의합니다. 해탈로 공간을 벗어나신 분들도 다시 들어와서 유란시아 계시를 공부해야 합니다.


118:3.5
 
공간은 비(非)절대적인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절대인 것에 가깝게 된다. 공간은 분명히 절대적 궁극이다. 우리가 물질 차원에서 공간을 납득하는 데 있어서 실제적으로 어려운 점은, 물질 몸체들이 공간 속에 있는 반면 공간은 또한 바로 그 몸체들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공간에 대하여 많은 것이 절대적이지만, 그것은 공간이 절대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18:3.6
 
상대적으로 말해서 만약에 너희가 공간이 결국 모든 물질 몸체들의 자산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면 공간 관계들을 납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몸체가 공간 속으로 움직일 때, 그것은 또한 그것의 자산을 같이 가지고 간다, 심지어는 그렇게 움직이는 몸체가 그 속에 있고 그리고 그 속에 있는 공간도 가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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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세 가지 귀의를 고백하기만 하면 되지만, 이 이후에 오계, 팔계, 십계의 규범을 따르고 나아가 팔만사천 교설을 터득하면서 귀의를 종착점에 닿아야 합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계-정-혜를 통하여 해탈에 이르는 것이지요.

불-법-승 중에서 운명이나 과정을 제외하고 진리의 본체를 말한다면 법이 될 것입니다. 법은 근원 진리이자 만물의 존재와 행태와 우주 운행과 질서의 이유이자 바탕을 말합니다. 움직이거나 정지하거나 생기거나 소멸하거나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서 법 안에는 현상이나 원리가 자연스럽게 포함됩니다.

 

간혹 법에서 현상이나 원리를 한 부분으로 정의하여 그것을 참된 법이라고 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도 유란시아로 돌아와서 처음부터 공부를 다시 해야 합니다.

바다의 모습은 육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닷속을 아무리 정복해도 바다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설명할 수 없지요. 시공간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사실, 원인, 현상, 본질을 정의하고 있는 법 자체를 바라보려면, 시공간을 벗어나지 않으면 그 실체를 올바르게 알 방법이 없습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시공간을 벗어나는 방법은 초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한 불가능하다고 그 배경을 설명합니다만,  내막을 모르는 분들은 유한 세계를 다 정복하면 절대 자유를 누리고 그것을 해탈이라고 여깁니다.  

 

법구경 화엄경을 정복하고 불경을 불태우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살불살조의 화두를 가지고 오늘도 어제처럼 벽을 바라보면서 시공간을 정복하려고 정진하고 있습니다.

외친다고 물러가고 깨달았다고 다가가는 것이라면 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것은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찰나가 이어져서 영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찰나가 사라진다고 해서 찰나를 뛰어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 오신 날에, 시간과 공간이 다르게 존재하듯, 공과 열반이 다른 것임을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염원합니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어느 종교나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유란시아 글이 있습니다만, 자세히는 모르지만 불교와 기독교는 교리나 전하는 진리가 달라서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서로 다른 방향과 관점에서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내용이 깊어서 동양에서는 꺼지지 않는 진리의 등불로 세상의 빛이 되어 왔습니다. 기독교도 서구에서는 마찬가지로 인류를 이끌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는 4번째 계시였던 예수님의 진리를 되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신 사건과 부활의 의미를 보다 중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기존 종교에서 그동안 인류에게 주어진 여러 시대적 계시를 온전하게 재발견하는 것은 힘들고, 5번째 계시인 유란시아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동일한 출발선에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유란시아 계시에 대한 확대된 깨우침이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불교의 미래에 위대한 변혁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기억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디오니스님의 댓글

디오니스 작성일

법은 따라야만 하는 강제적 규범이라서, 지극한 자유를 얻는 무상의 진리로 이해하는 말로는 쉽게 다가오질 않습니다. 노자가 말한 순리도 벗어날 수 없는 이치와 도리라서 약간의 강제성이 있긴 하지만, 법보다는 부드럽고 의미 확장도 쉽지요.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한계를 강조할 때, 법이 실감이 가고 가장 적절한 말이지만, 깨우칠 진리로 말할 때는 의미가 달라서 혼동됩니다. 하나는 수동적인 복종이고 다른 하나는 능동적인 선택이라서 아마도 용어의 올바른 이해가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아무튼 부처님이 깨닫고 대중들에게 가르치신 법은 궁극적으로는 자유라고 이해하는 데, 자신을 다스리며 우주 섭리의 근원이자 마지막에 도달하는 여정이 진리 실천의 상세한 내용이라고 짐작합니다. 유란시아 책에서 말하는 진리의 실체를 알게 되면 큰 변화가 있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책에도 그런 말이 나와 있고요. 개인적으로는 마음을 비운다,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실천과 수행이 유란시아에서 강조하는 사심 없음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진리 실천과 성취의 과정에서 점점 생각의 폭이 넓어지면 언젠가는 종교의 진리가 통합을 이룰 것입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댓글의 댓글 작성일

비움은 객체의 부정이고 사심없음은 객체의 사랑이에요. 동기와 운명이 모두 달라요. 과정만 비슷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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