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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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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량 작성일19-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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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이나 성경이나 사람은 완전을 성취하는 것이 주어진 운명인데, 달리 말하면 행복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행복을 달성한 것인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또 모든 것이 늘 변하기 때문에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일단 행복이 달성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한, 또다시 새로운 행복을 찾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참된 행복이란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면서 성장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현재의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워서 지금의 행복이 참된 행복이라고 믿을 수도 있지만, 고립된 자기만의 세상이나. 외떨어진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변하고 새롭게 발전하는 환경에서는 어제의 행복이 변함없이 오늘과 내일의 행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현재의 행복을 지키는 경우도 있겠지만, 스스로 정한 기준 속에서 자신의 왕국 안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행복이라서,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본보기가 되는 참된 행복은 아니겠지요. 참된 행복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어제와 오늘처럼 내일의 어떤 변화, 어떤 환경, 어떤 상대적 비교에서도 행복을 달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어제와 오늘이 다르듯이, 어제의 행복은 오늘의 행복과 다르고 또 내일의 행복도 오늘과 다른 새로운 것으로 행복이 달성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복이 계속 성장할 수 있어야 참된 행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또 다른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서, 지금의 행복이 약화시키거나 초라하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행복을 상대적으로 비교한다면, 그리고 아직 달성하지 못한 새로운 것이 늘 남아 있다면 지금의 행복은 그 순간 의미가 퇴색되고, 초라한 모습에 실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과 사물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대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상대적인 실망은 실망이 아니라, 오히려 반드시 새로운 도전으로 이끄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이지요.

오늘이 제아무리 행복해도 그것이 계속되거나 단지 확장되는 것을 원하고 있다면,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서, 참된 행복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도 있고 불행한 사람도 있지만, 참된 행복의 기준에서 본다면 누구나 똑같이 새로운 도전의 순간을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으로 나서도록 이끄는 용기와 힘은, 현실의 행복에 안주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아직 보이지 않는 새로운 행복을 달성해야 할 실체로 보면서 나설 것인가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유란시아 책에서 새로운 행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사람을, 소망을 가진 사람으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영이 가난한 사람"으로 표현하면서 참된 행복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행복을 차지한다고 선포하셨지요.

아직 이루지 못한 새롭고 참된 행복을 위해서 나서는, 그런 도전과 그를 위한 열정과 용기는 사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서 누구나 맘만 먹으면 쉽게 나설 수 있습니다. 불평을 가득 안고 의무처럼 도전하는 사람과 소망으로 여기고 신나서 도전하는 사람과 그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심신의 피로가 심하여 아주 심한 무기력에 빠져있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은 알게 모르게 새로운 행복을 추구하면서 매 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도전하는 새로운 참된 행복에는, 시간 속에서 존재하다가 소멸하는 것도 있고 시공간을 넘어 불멸하는 행복도 있습니다. 그리고 불멸하는 행복을 개인이 성취하는 열매라고 유란시아는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차원의 행복을, 예수님이 삶의 규칙으로 선포하신 진리와 연결시켜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신 진리는 삶에서의 새로운 황금률이지만, 우리가 달성할 목표에 어떤 차원으로 본다면, 행복에 대한 도전도 마찬가지로 적용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대하고 사랑하는 삶의 규칙에 대한 여러 차원을 사도들과 모여있던 신자들에게 가르치셨는데, 모두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147:4.4 

1. 육신의 차원. 순수하게 이기적이고 호색적인 그러한 해석은 너의 질문에서 가정한 것으로 잘 예증될 것이다.

147:4.5 

2. 느낌의 차원. 이 경지는 육신의 그것보다는 한 차원 높은 것이며, 동정심과 연민이 이러한 삶의 규칙에 대한 각자의 해석을 강화할 것임을 암시한다.

147:4.6 

3. 마음의 차원. 마음에서의 이성(理性)과 체험에서의 지능이 이제 행동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삶의 규칙이, 심오한 자아-존중의 고결성으로 체현된 최고의 이상주의와 조화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고, 선한 판단이 명령한다.
147:4.74. 형제같은 사랑의 차원. 자신의 동료들의 복지에 사심-없이 헌신하는 차원이 여전히 더욱 높게 발견된다. 하느님의 아버지신분을 의식하고, 그 결과로 사람의 형제신분을 인지함으로써 성장하여 나오는, 전심을 다하는 사회적 봉사의 이 더욱 높은 경지에서는, 이 기본적인 일생의 규칙의 새롭고 훨씬 더 아름다운 해석이 발견된다.
147:4.85. 도덕적 차원. 그러고 나서 너희가 해석에서의 참된 철학적 차원을 달성할 때, 사물의 옳음그릇됨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실제 통찰력을 가질 때, 인간 관계에서의 영원한 어울림을 감지할 때, 너희는 어떤 높은-마음을 갖춘, 이상주의적인, 지혜로운 그리고 편견 없는 제삼자가 그러한 하나의 명령을 너희 일생 상황에 대한 조절에서의 너희 개인적 문제들로 적용되는 것으로, 그렇게 바라보고 해석하리라 너희가 상상하는 대로, 그렇게 해석의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할 것이다.
147:4.96. 영적 차원. 그리고 그 다음에 마지막이면서 모두에서의 가장 위대한 것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어떻게 대하리라고 생각하는 그대로 모든 사람을 대하라는 신성한 명령을, 이 일생의 규칙에서 인지할 것을 우리에게 재촉하는, 그러한 영적 통찰력과 영적 해석의 차원을 우리가 달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관계에 대한 우주의 이상(理想)이다. 그리고 이것이, 너희의 최극 욕망이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일 때 모든 그러한 문제를 대하는, 너희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내가 비슷한 상황 안에서 모든 사람에 대하여 행하리라고 너희가 알고 있는 그것을, 너희가 모든 사람에 대하여 행해야만 할 것을 내가 하려는 것이다.”

 

이 가르침을 행복에 대한 기준으로 보면, 우리가 어떤 것을 불멸하는 참된 행복으로 볼 수 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행복의 도전도, 육신의 차원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영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원에 있을 수 있습니다.

 

1번 육신의 차원과 2번 느낌의 차원은, 일상 생활에서 아마도 생명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누구나 아는 행복에 대한 기준일 것입니다. 3번 마음의 차원도 자기 자신을 의미있는 존재로서의 스스로 확신할 수있는 그러한 새로운 행복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멸의 행복은 4번 형제사랑의 차원을 넘어서, 5번 도덕적 차원과 6번 영적 차원에서 달성하는 행복일 것입니다. 이것은 각자의 판단과 깨달음에 따라서 그 기준이 정해질 것입니다. 

댓글목록

디오니스님의 댓글

디오니스 작성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사람의 형제신분을 특히 강조하셨는데, 삶의 규칙에서 형제 사랑이 도덕적 차원보다 오히려 낮은 것이어서, 좀 혼란스럽네요. 사도들이 놀랐다는 것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도덕적 차원도 이유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봐도, 그 내용으로 이해하면 5번은 분명히 형제신분보다는 높은 차원이라고 공감은 갑니다. 그런데 이것을 예수님이 도덕적 차원이라고 지칭한 것은 그동안 이해하고 있던 도덕이란 개념과는 너무 거리가 있어서, 언뜻 이해되질 않네요. 책을 다시 살펴봐야겠습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형제 사랑은 인간적인 것이지만, 도덕은 초인간적 이상과 실체가 전제되야 하니까 차원이 더 높은 거에요.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참된 행복에 관한 주제이지만, 예수님의 삶의 규칙이 안일한 생각을 일깨워주네요.

삶의 규칙은 예수님이 실제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직접적인 설명은 없긴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각자 발견하라고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예수님을 모르면 하느님이 영적 아버지이고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들어볼 기회가 없으니, 4번째 차원을 성취하기가 어렵겠지요. 예수님을 믿어도, 새로 계시된 사람의 영적 형제신분을 실천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성경 말씀을 공유한다는 유대감에서 친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런 형제의 친밀감은 예수님을 몰라도, 잘 조직된 공동체 안에서, 깊은 유대감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형제애입니다.

공동의 목표에서 탄생되는 형제신분은 전쟁터에서 동료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영웅적 행위에서 가장 깊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악을 무찌르는 전선에서 생사를 함께하는 군인들의 형제 정신은 같보기에는 "동료들의 복지에 사심 없이-헌신"하고 "전심을 다하는 사회적 봉사"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형제애는 인간 이성과 감성과 의식에서 솟아나온 형제애이기 때문에, 공동의 목표가 사라지거나 공동체에서 이탈하면 저절로 사라지는 사랑이겠지요.

그래서 하느님이나 사람이나 참된 사랑은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아버지가 되는 그러한 집단이라면, 형제애도 신성한 아들신분에서 탄생되는 것이겠지요.

아쉽게도 신성한 형제애가 사회적 제도 안으로 들어가면,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인간적 형제애로 퇴색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가장 잘 알고 받드는 기독교도 아버지라는 진리보다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고 있고요. 하느님을 모르면 참된 형제 신분이 불가능하겠지요.

사트바님의 댓글

사트바 작성일

예수님의 삶의 규칙을 행복의 여러 단계로 이해하신 글이 공감이 갑니다. 예수님 말씀은 행복뿐만 아니라 모든 실천에서 진리일 것입니다. 완전을 이룬 결과가 행복이란 현상이라고 본다면, 물질계에서의 행복은, 완전을 이루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충실히 실천한 것이지요. 세상에서의 개인의 삶에 최선의 노력을 쏟았다는 증거인 셈이지요.

행복이 물질적 단계에서 초인간적, 초물질적 단계로 확장되는 것이라면 모든 완성에는 여전히 새로운 도약이 기다리고 있고, 노력이 필요한 삶의 여정은 끝없이 이어진다고 봐야겠지요. 삶이 번뇌에서의 탈출이라면 끝없는 탈출일 것이고, 성취의 반복되는 도전이라면 끝없는 성취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책에서는 어떤 성취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취하려는 의지와 헌신이 진정한 영적 열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완성이 중요하지만, 완성하려는 의지의 헌신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는 가르침도 함께 간직해야만 결국에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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