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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벗어나는 두가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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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너킥 작성일1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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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고통이 있으면 안 된다. 행복과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 고통과 슬픔을 피하려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것이 늘 행복과 풍요로움이 가득한 것이 아니다. 왜 그런지 알고 싶은 것이 아마도 진리를 찾는 동기일 것이다. 

 

유란시아 책에는 너무도 자세하게 모든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지만, 간단한 문장으로 마음을 감동시키는 경우도 아주 많다.

 

23 :2.5

유란시아의 혼동과 혼란이, 파라다이스 통치자들에게 관련사들이 달라지도록 관리하는 관심이나 능력이 부족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창조자들은 유란시아를 진실 그대로의 파라다이스로 만들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러한 에덴은 필요성이라는 모루와 고통이라는 망치 사이에서 하느님들이 분명하게 너희 세계에 이루려는 그 강력하고 고귀하며 체험된 성격들의 개발에 기여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걱정과 슬픔은, 너희의 시련들과 실망들은, 완전한 중앙우주의 세계들에서의 만물의 절묘한 완전성과 그들의 최극 목적에 대한 무한한 적응이 되는 것으로서 그만큼, 너희 구체에 대한 신성한 계획의 일부분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행복하고 기쁘고 만족스럽고 완전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는 많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당연하게도 고통이나 슬픔을 벗어나려면 먼저 슬픔과 고통을 만나야만 한다. 살다 보면 만난다는 의미이지, 일부러 체험을 해 보려고 이런 경우를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암튼 고통과 슬픔을 만나는 길이 두 가지가 있다. 그에 따라 벗어나는 길도 다르다.

 

첫번째는 대부분 그러하듯이 만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가 능력이 딸려서 눈뜨고 당하는 경우다. 눈물과 한숨과 자기 연민이 빠지는 것이 특징이다.

 

두번째의 경우는 결코 만날 일이 없다고 주제넘게 장담하거나 놀랍도록 무식해서 갑자기 당하는 경우다. 기가 막혀 하다가 서서히 분노하는 것이 특징이다. 

 

벗어나는 길도 두 가지다. 우선 첫번째로 지혜로운 길부터 알아보자. 

 

첫번째의 경우는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가능한한 빠를수록 몸이나 정신 건강에 좋다. 발버둥쳤는데도, 안되는 것은 더 이상 답이 없다. 잊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괜히 다른 방식으로 발버둥쳐 보려고 혹시나 미련을 가지다가는 자기 연민이 아니라, 자기 파괴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건 절망적인 위험한 발상이다. 

 

두번쨰의 경우는 스스로에게 분노하는 것이다. 진지하게 분노하고 그리고 분노의 에너지를 삭이지말고 분출하는 것이다. 술을 먹든 여행을 하든 운동을 하든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다. 괜히 주저않아서 자학하는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자기가 항복하는 것이다. 그건 보잘것없는 사소한 일을 스스로 극대화 시키면서 자학에 빠지는 길이다. 자학의 쾌감으로 고통을 대신하는 것이다. 정신적 상처로 확대될 위험도 있다. 

 

그런데, 첫번째 경우에서 만나고 두번째 경우로 대응하거나 아니면 두번쨰 경우에 만났는데 첫번째 경우처럼 대응하면 어떻게 될까?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그것이 지혜를 초월하는 길이자, 두번째의 길이다.

 

좀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지혜를 초월하는 길이 정답이다. . 

 

먼저 두려움에 조심조심 두들기고 의심되면 피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소심한 사람에게는 분노의 에너지가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 바뀔 유일한 기회이다. 토끼가 사자로 변하지 않으면, 토끼로 살다가 끝난다. 다시 태어나야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슬픔과 고통이 말끔히 사라지는 일은 그 새로운 세상만이 가능하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는데, 사람이 수백번 환골탈태해도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세상이 사람에 굴복하거나 맞추지 는 않는다. 언젠가는 결국은 또 만나게 된다. 

 

두번 째의 경우처럼, 존경받을 정도로 어리석거나 무식하게 세상을 사는 사람은, 한시바삐 세상 일을 잊어야 한다. 세상 일에 연연할수록 그 찬란한 어리석음이 널리 드러나고, 어쩌면 은밀한 조롱거리의 주인공이 된다. 혼자 날뛰는 춤을 구경하다가 싫증이 나면, 차갑게 외면하는 것이, 바로 슬픔과 고통을 주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빨리 잊고,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새롭게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 다시 당당해지는 유일한 방법이다. 작을 일에 함부로 나서서 춤추지 말라, 새삼스럽게 지혜를 갖추려고 하거나, 유식해지려고 애쓰는 것은, 당당한 어리석음을 스스로 내던지는 것이다. 그건 위험하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어리석음은 당당해도 아름다운 것이다.

 

잊어야 할 사람이 분노하고, 분노할 사람이 잊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게 바뀌는 새로운 세상은 이제까지 만난 적이 없었던 기쁨과 도전과 용기가 넘치는 세상일 것이다. 당장 얻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 잠재성이 가득차 있는 세상으로 바뀌어 새롭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잊어야 할 사람은 잊고 분노할 사람은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거기에는 아무 지혜도 용기도 도전도 필요없다, 자연스런 반응에 몸을 맡기면 된다. 그러나 그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저 소용과 용도에 따라 쓰임을 받는 시공간의 소모품일 수도 있다.

 

지혜롭건 어리석건 도전과 용기는 참된 것이다. 어쩌면 신성한 것인지도 모른다. 

 

댓글목록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고난과 역경이 없는 인생은 축복과 행운이 아니라, 가장 큰 불운이자 버림벋은 인생이에요. 피하면 안되요.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좋은 말씀입니다. 다만 망각이나 분노는 반응인데, 반응만 가지고 뭐라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과만 가지고 기준하기보다는 동기도 반드시 고려해야겠지요. 유란시아 책에서는 동기를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고요. 개인적으로도 나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면 그냥 묵과할 수 없지만, 상대방이나 커뮤니티를 위해서는 내가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옳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분노의 동기가 이기적인 탐욕 때문이려면, 용기나 행동은 자신은 물론이고 모두를 해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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