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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등명 법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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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트바 작성일20-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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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크리스마스처럼 전 세계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날은 아니지만, 불자들에게는 큰 의미 있는 날입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고타마 싯달다, 부처님을 인류를 이끈 위대한 진리의 계시자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진언 법문에서 바라본다면, ​부처님의 탄생이나 열반같은 기념일은, 연등 행렬처럼 피상적인 일시적인 마음의 잔상으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진언은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문자로 풀이하면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정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등불을 삼아서 무엇을 이루고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는 팔만대장경을 풀어도 다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전혀 무심하고 아무 생각없는 사람도 있지만, 지능이 있는 한 자기자신의 실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실제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있으니까 존재할려고 탐진치와 번뇌 안에서 삼업의 고를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즐거움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세계에서의 참된 삶이 있으니까, 영원한 삶도 반드시 있으리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변하는 물질 세상에서 아가 때부터 지금까지, 자기 스스로의 독자성은 불변입니다. 주인이 되는 주체로서의 스스로는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그 불변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이 진리를 찾는 불심의 개안이라고 말합니다. 정진하면서 발견하는 그 실체를 진여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불변의 자기 실체, 곧 참나를 부정할 때, 이기주의나 편견과 아집의 깊은 늪에서 ​세속의 헛된 삶을 맴도는 것이지요.

유란시아는 등불을 빛이라고 말합니다. 처음 책을 읽는 불자들에게는 진여, 곧 참나를 발견하고 그로서 모든 것을 이루는 새로운 진리의 계시라고 반가워할지 모르지만, 읽다 보면 연기의 진리나 수행과 열반의 성취나 깨달음의 완성이 다만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시공간의 시작이자 그 완성의 마음에 다가가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팔 만개도 넘는 경전들이 최극 마음과 그 법행을 정복하는 유한한 차원에서의 1차적 완성이라는 사실에 진여에 에 다가가서 열어가는 성주괴공의 긴 여정이 결국 우주 마음의 근원적 실체를 끌어안고 부처님의 열반 계송이 더할 나위 없는 무상이 아니라, 적정 열반을 의미하는 무저성의 무상과 뒤섞이게 됩니다.

자등명, 즉 스스로를 빛을 삼으라는 진리는 진여, 참나에 대한 진리입니다. 실존은 부인될 수없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에는 무자성으로 내어 놓아야만 불성을 이룬다고 하지요. 여기에 인간 언어의 한계와 함정이 동시에 있습니다. 자신을 빛으로 삼은 것과 법으로 빛을 삼는 것은 하나를 버려고 그다음에 택하는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참나를 개인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조주를 제외하고는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는 그 누구도 결코 정의할 수 없는 말 그대로의 영원성과 무한성에서의 신화된 실체입니다. 찰나마나 실존하는 개인이 매 순간 신성, 영원성, 무한성의 주어진 온갖 성을 완성하면, 아버지로부터 증여된 개인성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내가 완전하듯 완전하라는 명령은 자성에게 주어진 명렴입니다.

개인성이라는 스스로의 빛이 참나의 등불로 되어 유한 차원을 뛰어넘는 경지에 도달할 때, 진리의 빛은 그 절대적 근원을 스스로 밝혀줄 것입니다. 그러나 법등명을 마지막 등불로 여긴다면,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일체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바로 앞에서 모래톱에 좌초되어 있는 배"라고 표현합니다. 일체를 다시 해체하라고 요구합니다.

115:3.1
 
절대 조화우주는 개념적으로 한계가 없다; 이 일차적 실체의 범위와 본질에 대해 정의(定意)를 내리는 것은 무한에 분별된-자격들을 부여하는 것이고 영원의 순수한 개념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무한한-영원, 영원한-무한에 대한 관념은 범위에서는 분별불가적이고 사실에서는 절대적이다. 무한의 실체 또는 실체의 무한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언어가 유란시아에는 과거나 현재 또는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한 조화우주에서 유한한 창조체인 사람은 그것에 대한 이해가 실제로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제약이 없고, 한계가 없는, 시작이 없는, 끝이 없는 그 실존에 대한 왜곡된 반영과 희석된 개념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된다.
115:3.2
 
마음은 그러한 실체의 합일을 먼저 깨뜨리려고 시도하지 않고는 절대에 대한 개념을 파악할 희망을 결코 가질 수 없다. 마음은 모든 다양함을 통합하지만, 그러한 다양함이 존재하지 않는 바로 그 곳에서, 마음은 납득이 가는 개념들을 명확히 나타내려고 시도해 볼 수 있는 그 어떤 아무런 기초도 없음을 발견한다.

법등명으로 성취되는 모든 것의 근원인 비유비무의 무자성과 자성이 하나됨, 그 합일을 자등명으로 다시 해체하지 않으면 결코 절대에 대한 개념에 접근할 희망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유란시아 계시가 불자들에게 던지는 새로운 희망의 등불일 것입니다. 진리의 참된 빛으로 달성하는 절대적 연기의 끝은, 우주의 아버지가 시작한 절대 빛의 완성을 결국에는 다시 그 절대성의 빛으로 결국 드러나는 것 뿐입니다.

 

1:3.3
 
우주 아버지는 물질적 장애들과 제한된 영적 자질들을 가진 저급한 창조체들로부터 떨어져서 자신을 숨기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상황은 오히려 다음과 같다: “너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이는 어떠한 필사자도 나를 보고서는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어떤 사람도 영 하느님을 쳐다보고서는 그의 필사 실존을 보존할 수 없다. 신성한 개인성현존의 영광과 영적 찬란함은, 비교적 낮은 영 존재들의 집단이나 또는 어떤 계층의 물질적 개인성들도 접근할 수 없다. 아버지의 개인적 현존의 영적 광채는 “어떠한 필사 사람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어떤 물질적 창조체도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는 빛이다.” 그러나 영성화(靈性化)된 마음의 신앙-시각으로 그를 식별하기 위해 육신 계층의 눈으로 하느님을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우주에 가득한 신성한 개인성들과의 연과 기를 통하여 신성을 체득하는 삶이 현세의 개인이 시작하고 내세의 개인성을 영광과 영적 찬란함의 빛 안에서 이어잘 수 있는 참된 자등명의 삶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우주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 빛이 거의 없는 것이 개인성으로 존재하는 생영체를 탄생시켰습니다. 신성한 빛이 점점 희미하여, 창조자 아들이 증여의 삶으로 밝히지 않으면 빛을 찾기가 한없이 힘든 곳입니다.

여기에서 참나는 그 빛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이웃을 통해서 세상을 통해서 개인 안에 등불이 켜지고, 그 빛이 모여서 우주 진화를 함께 이끌어가는 대열을 이루어갑니다. 피상적으로는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빈 것으로 시작하고 빈 것으로 끝나지만, 실체적으로는 매 순간이 자등명과 법등명으로 우주를 담으면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댓글목록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부정의 부정이 긍정인 논리적 진리도 깨달음을 만나면, 사실적 진리가 되요. 그림자로 실체의 존재룰 알지요.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우주에서 움직임이 없이 영원히 정지된 곳은 오직 파라다이스란 설명을 단지 만물이 기원되는 중앙의 핵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의미와 함께 최극, 긍극을 포함한 미래의 모든 우주 차원을 모두 초월하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파라다이스를 제외한다면, 우주는 결코 우주 아버지나 영원 아들이나 무한 영의 기원적 삼위일체의 활동이나 현상이 결코 정지되는 일이 단 한순간도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모론시아 차원이나 영적 차원이나 아무리 모든 것을 성취해도 결코 정지될 수 없는, 움직임이 영원토록 지속될 수밖에 없는 성취가 될 것입니다. 어떤 차원에서도 모든 것을 완성하여 더 이상의 변화나 모자람이 없는 그러한 성취는, 파라다이스의 절대계를 제외하고는 불가능해야만 오히려 아버지의 절대성을 이해하고 비로소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어찌 보면 시공간의 존재의 한계 때문에 더 이상 이해될 수 없는 역설이 되는 것이지요.

유란시아 책의 설명에서 분다면, 시공간 중에서도 가장 낮은 차원이 물질계에서 성취하는 그 어떤 것도 완성이라고 말할만한 것은 없다고 봐야겠지요.

코너킥님의 댓글

코너킥 작성일

하느님 없는 종교적 진리나 혹은 철학적 깨달음이, 그리고 심오하고 명백한 과학적 증거들이 때로는 우주를 관통하고 만물을 해석하는 진리가 될 수도 있고, 사회적 봉사나 사랑의 실천에서도 가장 숭고한 이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위대한 철학에 만족하고 정진하는 분들에게 아래의 문장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진리일 것입니다.

[102:7.3]
하느님 없이 종교를 창안하려는 사람들은 나무 없이 과일을 모으려는, 부모 없이 자녀를 가지려는 사람들과 같다. 너희는 원인이 없는 결과를 소유할 수 없으며; 오직 스스로 이신 이만이 원인이 없으시다. 종교적 체험의 사실은 하느님을 내포하며, 개인적 체험의 그러한 하느님은 반드시 개인적 신(神)이어야만 한다. 너희는 하나의 화학 공식에게 기도하거나, 수학 방정식에게 탄원하거나, 가상적 추측을 경배하거나, 가설을 믿고 속을 털어놓거나, 일련의 수행과정과 교통하거나, 추상개념을 섬기거나, 또는 어떤 법칙과 사랑에 넘치는 우애관계를 가질 수 없다.
[102:7.4]
사실, 겉으로 보기에 종교적인 많은 특색들이 비종교적인 근원으로부터 자라날 수 있다. 사람은 지적으로 하느님을 부정하면서도 도덕적으로는 선하고 충실하며 효심이 있고 정직하며 심지어는 이상적일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의 기본적인 영적 자연본성 위에 순전히 인본주의적인 많은 가지들을 접목시킬 수 있지만, 그러한 체험은 생존되는 가치들, 하느님을 알아감과 하느님께로 상승함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한 인간적 체험 속에는 영적인 열매들이 아니라 오직 사회적인 열매들만이 맺힌다. 생존을 위한 자양물이 마음과 영 두 가지의 기원적인 신성한 자질의 뿌리로부터 흡수됨에도 불구하고, 그 접목이 열매의 본성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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