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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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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너킥 작성일2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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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계시는 인간이 죽음을 통과하여 영원한 삶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우리에게 깨우쳐주려는 목적에서 주어진 것이다. 그동안 많은 계시나 진리들이 인류에게 주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낙관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영적 존재들이 특별하게 나선 것이다. 그만큼 유란시아는 위기 상황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유란시아 책은 매 문장마다 깨우쳐 실천해야 하는 진리가 들어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우리는 진리를 만났을 때, 그것을 무작정 받아들이고 실천하기보다는, 그것이 내게 좋은 것인지 나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인지를 먼저 따져보게 된다.

모든 사람은 진실을 믿기보다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진실이다. 종교에서의 순교자처럼 참된 진리에 목숨을 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노력을 통하여 학문을 배우고 도덕을 깨우치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힘을 점점 더 갖추면서 사람은 변화된다. 그러한 성숙된 사람들은 자신에게 치명적인 피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진실과 거짓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악을 미워하고 선을 지키고 실천하려는 강한 의지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깨우침의 올바른 삶이 유란시아에서 말하는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이라고 말하는 유란시아 책에서의 생존은 그러한 의로운 삶과는 조금 다르다, 생존은 올바르게 살고, 참된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하늘의 질서가 아니라, 혼을 만드는 사람을 위한 우주의 질서임을 이 계시는 밝히고 있다.

책에서 계시하는 우주적 상승의 삶은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절대 진리를 위하여, 선을 위하여 싸우고 투쟁하고 굽히지 않고 대항하는 사람들의 끈질긴 모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갈등과 혼란과 고통과 슬픔도 이러한 투쟁에 포함될 것이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자신의 기분이나 아름다운 마음에서 시작되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관용과 헌신은 모험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영적 성취를 이루고 영의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영의 열매가 있기 때문에 사랑과 자비와 헌신이 나오는 것이다. 봉사와 자비가 선행되어야 영적 삶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영적 삶이 되어 있기 때문에 봉사와 자비가 나오는 것이다. 영적 삶이 되어 있다는 것은 진미선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맑고 신성한 의식으로 늘 깨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 아름다움, 선을 깨닫고 실천하려는 것은 영적 열매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가슴에 담고 있어야 한다. 진미선은 이미 자신에게 들어있는 것을 삶에 투영하며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혀 도전과 모험을 통하여 삶에서 실체가 드러나고 체험되는 것이다. 이것이 유란시아가 위기 상황에서 우리에게 계시하는 내용일 것이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은 진화 종교에 담긴 엄청난 진리로도 충분하다

 

34:6.13
인간 삶에서 영이 다스림을 의식하는 것은 그와 같이 영으로-인도된 필사자의 삶 반응에서 의 특징들의 증가되는 출현에 의하여 현실적으로 제시된다. “왜냐하면 영의 열매들은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선(善), 신앙, 온유함, 그리고 절제이기 때문이다.” 영으로-인도되고 신성하게 조명을 받는 그러한 필사자들은, 그들이 아직도 고통의 초라한 길을 걷고, 인간 충성심 안에서 그들의 세상 임무에서의 과업들을 수행하는 중이지만 한편, 이미 영원한 생명의 빛들을 식별하기 시작한 것이며, 그것들은 멀리 떨어진 다른 세계의 해안에서도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다; 영감을 주고 위안을 주는 진리, “하느님의 왕국은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고 성령 안에서의 정의(正義)와 평화와 기쁨에 있다”는 것의 실체를 그들은 이미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영이-탄생시킨 혼들은 모든 시험에 두루 그리고 온갖 고단함이 가득한 현존에서도 모든 두려움을 초월하는 바로 그러한 희망에 의해서 견디어 지속될 수 있으니 이는 신성한 의 현존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가슴 속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진미선을 발견하는 근원적 원천은 생각조절자이다. 그리고 그 통로인 진리의 영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진리의 영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통로가 없기 때문에, 진미선의 신성은 우리에게 전달될 수 없다.

생각조절자가 깃들어도, 개인성과 신성이 영적 융합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단편적인 영적 결실만 거두는 경우가 잇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유란시아나 혹은 다른 행성에서, 진리의 영이 부어지지 않은 상태의 필사자, 즉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의식이 올바르게 성장하지 못한 원시 시대의 필사자들은 아버지 융합이 아닌, 영 융합된 존재로 설명한다. 모론시아에서 불멸의 삶으로 생존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안에서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서 운명에서 다르다. 쉽게 이해해서 아들관계의 개인성이 아니라면 마치, 마치 천사와 같은, 물질적 개인성에서 어떤 모론시아 그리고 영적 개인성으로 부활하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40:5.7
체험적 조절자는 원시 인간 존재와 함께, 육신에서의 그의 전체 삶에 두루 여전히 남아있다. 조절자들은 원시인들의 진보에 많이 기여하지만 그러한 필사자들과의 영원한 연합을 형성할 수는 없다. 조절자들의 과도기 사명활동은 두 가지를 이룩한다: 첫째로, 그들은 진화적인 지능체의 본성과 활동에서 가치 있고 실재적인 체험, 다른 세계에서 더욱 발달된 존재들과 나중에 접촉하는 것과 관련하여 매우 귀중하게 될 체험을 획득한다. 둘째로, 조절자들의 과도기 체류는 뒤이어 가능하게 될 융합을 위한 그들의 필사자 주체들을 준비시키는 쪽으로 많이 기여한다. 하느님을 찾는 이러한 유형의 모든 혼들은 지역우주의 어머니 영의 영적인 포옹을 통하여 영원한 삶을 성취하며, 그렇게 지역우주 체제의 상승하는 필사자들이 된다. 아담의-이전(以前) 유란시아로부터 많은 개인들이 그렇게 해서 사타니아의 맨션세계들로 나아갔다.

 

부활 이후 운명이 달라도 영원한 삶은 동일하다. 융합은 영원한 삶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언젠가는 일어나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융합의 운명이 어떠한 것인가가 아니라, 일단은 부활의 방에서 깨어나야만 필사자의 삶은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부활에 필수 요소는 혼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혼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부활에 필요한 것은  개안을 나타내는 개인적인 혼이다.

혼에 개인적인 요소가 없다면 우주 대혼으로 흡수된다는 말은 하느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으시고 우주에는 그 어떤 오류나 헛된 일이 일어날 수 없음을 반증한다. 개인적인 혼은 스스로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이라는 말은 개인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받아들이고 체험하면서 우주가 영원히 그리고 무한하게 펼쳐지는 신성한 질서와 법칙에 자신을 바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유란시아에서는 사명봉사라고 정의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기쁨과 슬픔과 고통과 행복이 늘 교차하는 가운데에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개인적인 혼을 지니고 부활의 방에서 깨어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수없이 깨어나도록 외치는 진리의 선포가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은 저절로 누구나 진리 안에서 부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란시아에서 부활의 숫자가 적을수록, 인간을 생존시키기 위한 진리의 선포나 계시는 그만큼 절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5번째 계시가 주어졌다는 것은 이미 인류가 한계에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누구나 일상이 일에서 최선을 다할 때, 온 마음과 정성을 바칠 때 그 내면에 혼을 생성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혼의 많은 것은 이기적 혹은 사실적 실체일 뿐, 우주적 진리를 담는 개인성을 표현되는 개인적 혼은 아닐지도 모른다.

유란시아 책에서 놀라운 우주론을 깨닫고 그 우주적 진리에 격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생한 체험이나 감동은 지적 그리고 때로는 감성적인 각성에 머무를 위험이 있다. 개인성의 핵심적인 요소가 등한시되는 함정이 있다. 개인적 체험은 물질 삶을 바탕으로 우주적 법칙으로 확장되어야만 한다. 유란시아 계시의 목적의 하나인 우주 의식이 바로 이것이다. 우주 의식은 우주를 새롭게 깨닫는 지식이 아니다.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첫 번째는 개인적 삶에서 발견하고 찾아내는 진리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진리의 실천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단편인 신성이 매 순간 그 빛을 비추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세 번째인 아버지의 뜻에 따르려는 헌신이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댓글목록

두세개님의 댓글

두세개 작성일

계시로 주어지기 위하여 예비적으로 접촉이 시작되었던 때가 1920년 중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책으로 출간할 준비는 되었으나 세계대전의 여파로 1953년에 처음 계시서로 인류에게 선을 보였다고 들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당시가 왜 인류가 한계에 있다는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늘 그렇듯이 간간이 위기는 있었지만 그 이후 경제, 사회는 물론이고 초첨단 과학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물질문명의 발달은 지속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발전에 유란시아 계시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없다고 봐야겠지요. 계시는 영적 진리를 밝혀주는 것이라서 물질적 번영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란시아 책을 읽어서인지 모르지만, 지금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정신적, 심리적, 지적, 영적인 수준을 냉정하게 생각하면, 과연 하느님의 진리를 깨우치고 그에 따라 살아가려는 의지가 사람들에게 남아있는지 의심이 듭니다. 의지를 깨울만한 종교적, 철학적, 사상적 진리나 그런 스승들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지가 의심스럽습니다.

그 당시에 유란시아 책이 미리 준비되어 지금 하나의 돌파구가 자리를 잡고 있지 않다면, 계시자들의 염려대로 인류의 영적 진보는 더욱 어두운 시대 안에서 길을 잃고 깊은 수렁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계시자들은 그런 형편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때를 불가피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고 봅니다.

영적 위기를 전혀 감지할 수 없었고 지금도 그러한 인간의 형편에서 본다면, 지금 계시를 읽고 우주 운명을 안다고 해서 무조건 혼이 형성되고 생존된다고 안심하는 것은 영적 착각일 것입니다.

지금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경을 이겨내면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성취하는 신성한 열매가 없다면 영원한 삶이 펼쳐지는 세계로 초대될 수 없을겁니다. 계시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이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시대적 계시는 당대보다는 후대를 위한 거예요. 당대는 전통의 타성과 계시가 뒤섞여 혼란을 겪게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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