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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불의와 영적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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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네오 작성일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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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악과 거짓이 세상을 불의에 빠지게 하고, 결국에는 가난과 폭력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런 와중에서 선량한 사람들이 서서히 힘을 잃고 악에 굴복하거나 피해를 입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진리를 포기하고 악의 회오리에 휩쓸린 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살아있는 진리가 지니고 있는 그 어떤 힘도 발휘해 보지 못하고 어떤 체험도 해보지도 못한 채, 마음과 생각으로만 진리를 알고 확인하고 위로를 삼는 경우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불의와 타락과 탐욕을 당당하게 마주 보며 용기 있게 대항하려는 의식이 점점 작아지고 결국에는 포기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힘없는 만만한 상대를 찾아서 자신의 참됨과 의로움과 당당함을 확인해보려고 하고 약점이 발견되면 그것을 기회로 삼기도 합니다. 자신이 이겨낼만한 악과 잘못을 찾아내서 질책하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정의로움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참과 거짓만을 구분하거나 악을 응징하고 맹비난하는 진리는 역동적인 진리가 아니라, 자기 분노에서 비롯되는 상대적인 선악의 판단이며, 그것은 죽어있는 진리입니다.

살아있는 진리는 반드시 판단이나 생각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성장할 수 있는 실체, 의미, 가치가 생각이나 행동 안에 중심을 이루고 있어야만 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당당함이나 의로움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에 대한 확신을 말하고 있어야만, 비로소 살아있는 힘으로 악을 사라지게할 수 있는 것이지요.

유란시아 책에 살아있는 진리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아마 유란시아 책에만 있을 것입니다. 참되고 올바른 판단에 대한 깨달음과 가르침은 수없이 많지만, 판단의 근거나 기준을 깨우칠 뿐이고 살아있는 실체를 계시하는 것이 없습니다.

 

132:3.4
계시된 진리, 개인적으로 발견된 진리는, 인간 혼의 최극의 기쁨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마음과 내재하는 영이 공동으로 창조한 것이다. 진리(眞)를 식별하고 아름다움(美)을 사랑하는 이 혼의 영원한 구원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하느님을 찾으며 그를 닮아가려는 단 한 가지의 목적만을 개발하도록 이 필사자를 인도하는 선(善)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에 의하여 확인된다. 진정한 지식과 진리 사이에는 아무 충돌이 없다. 지식과 인간 신념들, 편견으로 채색되고, 두려움에 의해 변형되고, 물질적 발견이나 영적 진보의 새로운 사실들에 대처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써 지배를 당하는 신념들 사이에서는 아마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악이 드러났을 대, 그에 대비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하면서 위로를 받고 악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지곤 합니다. 자신이 참되다고 여겨지는 요소만을 골라서, 그것을 악으로 정하여 분노하면서 한편 스스로 진리를 실천한다는 의식을 느끼곤 합니다. 보통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실제로 하느님을 모릅니다. 믿음으로만 다가갈 뿐입니다. 제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사람도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삶이 정의로운 것인지, 참된 것인지, 하느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진리의 삶을 살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 의식의 저변에서는 자기 존재, 자신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자기 확신이나 자기도취에 빠져도, 일시적일 뿐 스스로 참되다고 정의도 확신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원래 없는 헛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 한, 이 불확실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자아 의식이 없는 삶이겠지요. 그것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이 참된 진리입니다.

살아있는 진리는 상대의 악이나 잘못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발견하고, 악에 분노하며 확인되는 진리가 아닙니다. 자신을 확인하면서, 스스로 인정하려는 진리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진리는 인간 의식의 저면에 깔려있는 근원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진리입니다. 어떤 악이나 불의에 싸여 있더라도, 진리는 살아있다는 역동적인 외침과 그 진리 안에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진리이지요.

생각이나 눈에 보이는 모든 불의와 악에 대하여, 비난하고 분노하기보다는 그러한 악에 상관없이 그것을 초월하는, 새로운 진리가 솟아나도록 하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솟아나는 진리는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힘을 지닌 진리입니다. 여전히 상대를 기억하거나 확인하거나 그에 관계되어 실감하는 진리는, 진리의 영이 인도하는 힘찬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위로와 두려움을 극복해 보려는 지성이나, 감성에서 나오는 진리 의식이겠지요. 영성에서 나오는 진리의 힘이 아닙니다.

영에서 솟는 힘찬 에너지를 실감하면서 그 역동적인 길을 삶의 방향으로 여기면서 하나씩 체험할 때, 작은 걸음으로 나아가는 그 발걸음이 아무리 느리더라도,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이루게되는 것이지요. 그러한 진리의 길에는, 우리 자신을 기다리던 하느님의 신성을 만나고, 몸과 마음과 혼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을 이루게 만듭니다.

그 진리의 모습은 저절로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사랑이듯이, 그의 자녀도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가 점점 사랑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2:5.1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우주의 관련사들에 대한 유일한 그의 개인적 태도는 항상 신성한 애정 반응이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증여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는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태양을 뜨게 하시며 온당한 자와 부당한 자들에게 비를 내리게 하신다.”

2:5.10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현명하고 통찰력 있는 부모의 애정이다. 신성한 사랑은, 신성한 지혜와 우주 아버지의 완전 본성의 다른 모든 무한 특징들과 합일된 관계적-연합 속에서 기능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지만, 사랑이 하느님은 아니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현대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가 정의를 위하여 용기 있게 나서는 중세시대의 투사가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는 행복에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대가라고도 말합니다.

어쩌면 안락한 삶에 감추어진 무기력증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현대인의 무기력증의 가장 대표적인 2가지 원인은 삶의 특별한 목적이 없거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일이 반복될 때 생기는 병이라고 합니다. 실은 피하기만 하면, 누구나 나름대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실제로 그러한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겠지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알지 못하거나,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그 신성한 시작과 운명을 깨닫지 못하면, 죽어있는 진리 의식은 대부분의 종교인들, 특히 하느님을 굳게 믿고 있다는 분들에게는 진리는 고사하고 오히려 자신의 참모습마저 영영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방해물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느님의 사랑을 일신의 행복을 쟁취하는 이기적인 수단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요. 신성한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구별할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이기적 유전자'가 생명체의 본성이에요. 영으로 깨어나지 않으면 인간성은 동물성이에요. 그게 진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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