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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벗어나는 내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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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너킥 작성일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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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주요 종교는 신자 숫자로는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이다. 대승 불교에만 하느님에 대한 개념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종교에서의 한계는 하느님 혹은 절대자에 대한 실체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없는 그 불가능성에 있다.

유란시아 책은 이러한 한계로 인한 깨달음과 영적 성취의 정체를 새롭게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우주 아버지에 대한 첫 부분의 글을 시작으로 영원 아들 무한 영과 삼위일체에 대한 계시는 하느님을 실체로서 깨닫고 다가가는 예전에는 결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살아있는 진리의 근원을 계시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믿음의 바탕이 된다.

절대자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실체적 의식이나 그 실존적 진리 없이는, 아마도 인류가 영원한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서 파라다이스 하느님 앞에 서는 운명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구원과 생존에 관한 하늘의 법칙이 어떠한 것인지는 유란시아 책에서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지만, 유란시아 책이 없던 과거에, 인간이 영원한 삶으로 구원될 수 있는 지의 여부는 각자 나름대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진리의 영을 보내기 이전에는, 극히 소수의 사람만들 제외하고는 생각 조절자가 인간 몸에 깃드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점을 감안하고, 한편 불멸의 존재로 부활하는 데에는 생각 조절자의 역할이 결정적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증여 이전, 곧 진리의 영이 증여된 이전과 이후의 상황은 좀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진리의 영 증여 이후, 생각 조절자가 모든 사람에게 내주 한 2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는 구원되는 인류는 숫자가 엄청나게 증가되었을까? 진리의 영을 받지 않은 시대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각 시대의 사람들의 종교적 삶과 그 열매를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 이전의 사람들의 삶에 관하여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 유란시아 책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종교관과 일상의 신앙생활과 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삶의 내용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책은 유란시아 책뿐이다. 더구나 이 책에서는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4번의 계시가 있기까지의 인류의 모습에 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책을 읽은 독자라면 3부와 4부의 글에서 진리의 영이 증여되기 이전의 인류가 지닌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어떠한지를 잘 알 수 있다.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살펴본다면 유란시아 책에서 제시하는 여러 글에서 진리의 영 이후의 시대가 보여준 인류의 모습은, 그 이전의 모습과 특출하게 구분될만한 것이 없다. 예수 이전의 구원이나 예수 이후 시대의 구원이나 큰 차이가 없다.

우선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같은 하느님을 경배하고 기도한다. 특별한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을 대신하는 예수님을 중재자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성자가 성부의 독생자라는 믿음은 기독교의 핵심 되는 진리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그를 통해야만 접근된다고 여긴다. 이것이 기독교의 중심 교리이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절대성을 대신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의 기독교는 불행하게도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그 엄청난 사랑을 베푸신 독생자 아들이지, 하느님의 절대성을 계시하는 분이 아니다.

원시 종교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의식을 가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적 영적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하느님에 대한 구체적인 의식은 없지만 존재성은 두려움의 상대로 확고하고 생생한 믿음이 있었다. 지금까지 이어진 두려움과 복종의 신앙 모습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전통 종교가 우주 아버지의 실체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또한 가장 앞선 진리에 바탕을 둔 기독교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두려움과 회개의 순종의 종교 모습을 보이며 퇴보하고 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글자 그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는 것은 진리이다. 새로운 계시인 유란시아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는 것을 핵심 되는 진리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기독교가 유란시아가 말하는 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 전혀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기독교는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한 하느님에 대한 진리가 성경에 있기는 하지만, 실제 기독교가 섬기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에수님의 구원의 능력이 신앙의 본질로 되어 있다.

하느님의 실체성을 구체적으로 모르는데, 무슨 수로 하느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을 섬기는 것으로 설명하는 구약 시대의 원시 종교관을 글자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결국 섬기는 장소인 교회에 충성하고, 하느님 말씀인 성경을 실천하는 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강조한다. 삶의 실천에 관한 의미에서 본다면 성경은, 어느 경전, 어느 철학자, 어느 현자의 가르침에서도 만날 수 있는 올바른 삶을 사는 지혜와 교훈에 불과하다. 다만 순종하는 그런 삶을 하느님이 기억하고 구원한다는 말이 추가되어 있지만, 그외는 다른 종교적 삶의 실천과 차이가 없다.  

 

그리고 하느님이 기억한다는 말도 하느님을 모르는데 과연 호언장담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성경에서는 따져보지 않고 무조건 믿는 것을 눈먼 신앙이라고 말하는데, 막상 성경에 있으니 무조건 믿으라고 주장하면 모순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유란시아 책에도 똑같이 제시되어 있다.  

 

111:5.1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내적인 삶을 하느님─내적 의미-가치가 가능한 그러한 창조체의 삶을 만든 바로 그 하느님─과 기꺼이 나누겠다는 창조체의 표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눈다는 것은 하느님과-같음─신성한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영원한 아들 그리고 무한한 영과 나누시며, 그들은 다시, 모든 것들을 신성한 아들들과 우주의 영 딸들과 차례로 나눈다.


내적인 삶을 하느님과 기꺼이 나눈다는 의식을 가지려면, 외적인 삶과 내적인 삶을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외적인 삶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세상에서 부딪치고 희로애락의 소용돌이에서 살아가는 삶의 현장일 것이다. 외적 삶을 이해하는 것은 전통 종교나 유란시아 계시나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적 삶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다. 하느님의 실체를 모르면 실존성, 본성, 속성 우주와의 관계 개인과의 관계를 의식에 담겨있지 않으면 외적 삶과 반대되는 것을 내적 삶으로 정의하게 된다. 다시 말해, 현실 삶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내적 삶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은 충성과 복종과 순종과 종교 시설에 더욱 헌신하도록 강요하는 길로 이끈다.

하느님이 자신의 뜻을 실천하는 장소로 교회나 종교 시설을 지정했다는 생각도 하느님을 제멋대로 정의하는 실제로는 악한 행동이다. 그런 식으로 하느님을 강조하는 해석이 왜 악한 것인지는 예수님이 당시의 경건한 종교 지도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런 내용이 적힌 성경을 믿으라고 말하면서도,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을 섬긴 것과 현재의 종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직시하기를 피한다. 똑같은 일을 하지만, 내가 하는 것은 악이 아니라는 자기 변명일 수도 있다.

내적 삶은 "내적 의미-가치가 가능한 삶"이라는 계시도, 하느님에게 헌신하는 의미-가치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헌신을 기꺼이 하느님에게 나누고 바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라고 좋아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헌신을 가족과 이웃에게도 계속 권해야 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하느님의 실체성을 구체적으로 깨닫지 못해서 그렇게 해석하게 된다. 그런 원시 신앙의 믿음이 전통 종교의 ​한계이다. 그 속박에서 벗어나야만 유란시아 계시를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벗어나기를 거부할 것이다. 

경배와 기도의 삶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내적 삶이 아니다. 유란시아 책에서 말하는 내적 삶은 하느님을 받드는 삶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능동적 개념이다.
 

111:4.9
사람의 이 내적 삶이 참으로 창조적이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는 이 창조성이 자연발생적이고 전혀 우연한 것이 되게 하든지 아니면 통제되고, 지도되고, 건설적인 것으로 되게 하던지 그에 따른 선택의 책임이 주어져 있다. 그것이 기능하는 무대 위에 선입관, 미움, 두려움, 분노, 복수심, 편협한 신앙들로 이미 가득 차 있다면 창조적인 상상력이 어떻게 훌륭한 자녀들을 출산할 수 있겠는가?


단적으로 말해서 내적 삶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창조적인 삶이다. 창조란 것은 하느님을 생각하고 받드는 행위에서는 나올 수가 없다.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창조적 삶의 바탕은 물질적 삶이고, 창조의 바탕과 동기도 물질적 현실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 감각으로 인식되는 현실에서 우연히 떠오르는 새로운 것은 창조가 아니다. 현실에서 발견되는 사실에서 자연적으로는 나타날 수 없는 새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창조적인 삶이다. 그러한 창조적인 삶이 바로 내적인 삶이다. 그 삶을 하느님과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창조적 내적 삶을 나눈다는 의미는, 창조성이 하느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실천적 삶의 모습일 것이다. 창조적 상상력은 하느님 자체를 상상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큰 착각이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밤낮을 쉬지 않고 하느님을 상상한다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창출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사물은 말할 것도 없이 음악이나 그림 같은 비 물질적 창조도 전혀 내놓을 수가 없다. 창조성이 발휘되지 않은 삶은 내적 삶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상상일 뿐이다. 그리고 창조성이 결여된 상상은 망상일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과 함께 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에 깃든 창조성을 실제로 발휘하여 그 창조적 열매를 일상의 삶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감각이 아닌 내면의 의미와 가치 세계를 생각이 아닌 사실적 실체로서 새롭게 만들어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반드시 따져보고 다짐해야만 한다.

우리의 목표는 내적 삶을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창조성을 끄집어내어 현실 삶에서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실체를 계속 장초 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비법이 아마 사랑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단지 느낌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의미와 가치의 창조를 위한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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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그램님의 댓글

홀로그램 작성일

일일신우일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임금이 세숫대야 밑에다가 이 글자를 새겨놓고 아침 세수할 때마다 마음을 추스렸다고 합니다. 매일 새롭게 맞이 한다는 것이 창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매일 새롭게 하루를 보냈다면 창조성을 발휘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보내는 매일의 모습은 어느 한 사람도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일에서 물질적 혹은 초물질적인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면, 매일매일이 같은 일이 반복되는 일상이라고 해도,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자신의 의지로 역경 속에서 피어나는 그러한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동조시키는 창조성은 아니지만, 매일 아침을 흥미진진한 설렘으로 반갑게 맞이하는 어린아이들이 어쩌면 창조적인 삶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일일신우일신으로 아침을 열어갈 수 있다면, 그러한 내적인 삶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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