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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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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새 작성일2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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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휴일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다가온다. 매일을 새롭게 사는 사람이 많겠지만, 금년에는 온 세계가 중국에서 시작된 전염병으로 예전과는 여러모로 다을 것이다. 그럼에도 새해는 누구나 각별한 의미로 맞이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 그것을 모르는 바보는 없다. 그것을 시간이라고 부른다. 시간을 체험하지 않는 존재는 살아있는 존재라 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시간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 ​시간은 공기나 태양처럼 원래 저절로 있는 것이라서, 시간 자체의 의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시간이 왜 있는지 어떻게 있는지 생각하거나 질문을 가진다면 바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란시아는 시간에 대하여 많은 것을 계시하고 있다. 사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공간적 현상이기보다는 시간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 어떤 공간도 모든 만물도 시간 속에서 변한다. 그래서 삶이란, 행복한 사람이 시간 속에서 행복이 변하지 않도록 지키는 현상이고 반대로 괴로운 사람은 빨리 모든 상황이 변하도록 싸우는 현상이다.

시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나 작용하는 기능은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동일하다. 그럼에도 같은 시간에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사람도 있고 실패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주어진 환경, 조건, 선천적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누구에게나 시간이 공평해도, 시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조건으로 결정된다고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자연의 모든 만물은 원래 존재하는 방식대로, 존재하도록 되어 있어서, 시간 자체에 의미가 없다는 말은 진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은 무자비할 정도로 정확하다. 1+1은 반드시 2다. 하나를 가진 사람이 하나를 보태면 둘로 늘어나고 100을 가진 사람이 100을 보태면 당연히 200으로 늘어난다. 가진 만큼 더한다면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 자연이고 그렇게 늘어난 결과도 자연이다. 그런 면에서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에게는 시간이 각별한 의미가 될 수 있다.

사람의 판단에서 본다면, 원래부터 1을 가진 사람과 원래부터 100을 가진 사람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양적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의 의미에서 본다면, 단지 원래의 것을 자연 반복한 것이라면, 2나 200 이나 아무 차이가 없다. 전적으로 시간의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유란시아는 물질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반드시 소멸을 겪는, 필사의 시간 세계이다. 그러나 물질세계 너머 펼쳐진 세계는, 죽음이 없는, 불사 불멸의 모론시아 차원과 영 차원, 그리고 마지막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이들 차원을 상승할수록 시간의 의미는 천년이 하루가 되고 결국에는 수십억 년이 한순간의 찰나에 응집되는 세계에 도착하여 살게 된다.

이러한 삶을 유란시아 책에서는 필사자의 삶에서 시작하여 생존을 거쳐 영원한 세계로 상승하는 하느님의 아들의 운명이라고 계시하고 있다.

물질세계에서의 시간이 원래 가진 것을 보태는 자연적 증식의 시간이라면, 시간의 의미가 점점 응집되는 세계는 당연히 같은 시간의 세계가 아니다.만약 같은 시간 세계라면 상승할 이유도 없고 상승해도 그 어떤 행복도 맛보지 못할 것이다. 물질 세상이 끝없이 이어진다 해도 양적인 확장일 뿐, 질적인 성장이 전혀 없을 것이다. 불멸의 세계는 시간의 의미가 유란시아 보다는 좀 더 응집된 실체들, 사실들, 사건들, 현상들만이 존재해야만 할 것이 틀림없다.

인간은 그러한 세계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의미는 수긍할 이해할 수 있다.

28 :6.9
 

간의 의미. 시간은 모든 의지적 창조체들의 하나의 우주 자질이다; 그것은 모든 지능 존재들에게 위임된 “한 개의 재능”이다. 너희 모두는 너희 생존을 보증할만한 시간을 갖고 있다; 시간은 그것이 무시됨으로써 묻힐 때에만, 너희 혼의 생존으로 보증하도록 그것을 활용하기에 실패할 때에만 치명적으로 낭비된다. 가능한 한 가장 충만한 정도까지 어떤 존재의 시간을 증진시키기에 실패하는 것이 치명적인 형벌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상승하는 그의 여행에 있어서 시간의 순례자들을 지체시킬 뿐이다. 만일 생존이 획득된다면, 다른 모든 손실들은 만회될 수 있다.

 

재능이란 talant, 곧 예수님이 청지기와 씨앗의 비유로 가르친 "달란트"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간이 모든 지능 존재들에게 위임된 한 달란트라는 사실은, 시간은 전적으로 공평하므로 그 위임도 재능도 같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시간을 증진시키라고, 충만하게 증진시키지 않아도 상관없으나, 증진을 못하는 것은 치명적이라고 엄숙하게 계시한다.

 

시간을 사는 삶은 재능의 물리적인 양적 증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증진 곧 질적 응집이다. 시간 자체는 양적인 변화는 가능하지만 저절로 질적 변화는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론시아 세계로 상승하려면 시간의 의미, 곧 그 재능인 시간의 역할에서 어떤 응집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이라는 위임받은 재능 자체는 동등하게 주어진 것이고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각자의 선천적 혹은 후천적 재능도 양적인 증가일 뿐, 시간의 의미를 응집하는 데에서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물리적 재능이 많을수록 오히려 시간을 허비하기가 쉽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의 의미, 곧 위임된 재능으로 시간을 증진시키는 일, 어쩌면 물질 세계의 시간에서 불멸 세계의 시간을 약간이라도 맛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누구에게나 위임된 재능을 올바르게, 우주의 상승 계획에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누구에게나 과거라는 시간이라는 위임된 재능이 발휘된 체험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서 자연적인 시간을 질적으로 단축시킨 어떤 실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잊고 쏟아부었던 사랑일 수도 있고, 열정일 수도 있고, 고통을 이겨내려는 투쟁일 수도 있다. 아니면 동물적 게으름이나 세상의 악에 도전하는 전쟁의 시간일 수도 있다.  

 

그 과거의 성공, 실패의 결과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을 몰입했던 실체, 얼마나 많은 시간의 의미가 녹아있는지가 중요하다. 그것이 혼이다.

혼은 성장하기 때문에 과거는 현재와 미래에서도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시간이나 미래의 시간이 항상 새롭게 위임된 재능을 발휘한다는 가능성에서 본다면, 혼을 제외하고는 과거의 사건들은 상대적으로 무의미할 수도 있다.

오늘 맞이하는 시간, 그 위임된 재능을 혼이 잉태되는 사랑, 헌신, 도전, 투쟁 그리고 진미선의 발견에 사용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시간의 의미는 달라질 것이다. 시간의 자연적 흐름에 심신을 맡기고 느낌대로 생각대로 양적인 증가만 반복한다면, 시간의 의미는 세상에서의 성공에 관계없이 보잘것없이 될 것이다.

다가올 미래가 또 다른 열정을 쏟아붓는, 혼이 잉태되는, 새롭고 두렵고 신비로운 미지의 모험의 시간이라면, 다가올 어떤 시간도 가슴 설레며 기다려질 것이다. 미래가 있다는 것은 시간의 의미가 예전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말하지만, 기대가 자연적으로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라면 누구나 예측이 가능한 것이며 그것은 시간 속에서 별 의미가 없다.

내일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로 인하여 아무도 몰랐던 잠재가 실재로 이 세계에 드러나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시간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이다.


26 :5.3
 
이때 그것은 공간의 신앙-시험을 받은 그리고 많은-여행을 한 순례자들에게 주어지는 초보적이자 기본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하보나에 도착하기 오래 전에, 이들 상승하는 시간의 자녀들은 불확실성 위에서 마음껏 축제를 즐기고, 실망 위에서 살찌우고, 외견상 명백한 실패 위에서 열중하고, 어려움의 현존 속에서 활력이 북돋고, 광대함에 마주하면서 불굴의 용기를 내보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의 도전에 직면하였을 때 정복당하지 않는 신앙을 발휘하는 것을 배워 왔다. 그 후로 오랫동안, 이 순례자들의 투쟁 구호는 바로 이것이었다: “하느님과의 연락 안에서는 어떤 것도─절대로 그 어떤 것도─불가능은 없다.”


우리의 삶이 어제, 오늘, 내일이 여전히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으로 전개되도록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의 의미로 위임된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스스로 찾아 나설 것인가.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된다.

 

그리고 결정만 내린다면, 내주 하는 아버지의 신상한 단편이 그 황홀한 투쟁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불멸의 세계로 상승하는 운명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코로나로 온 세계가 몸살을 앓는 와중에 신년을 맞이하니 시간의 의미가 각별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려운 시기일수록 더욱 우리가 가까이에서 실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의지만 있다면 어떤 난관이라도 오히려 용기를 일으키는 자극이 된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마음과는 달리 특별한 의미도 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늘 보면서, 여전히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완전 속에서 의지를 불태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하느님의 뜻이자 명령인 '내가 완전하듯 너희도 완전하라'는 1편 글의 당부를 선언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겠지요.

매 순간의 사소한 일에서 더욱 완전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판단하고 마음을 움직이고 몸을 작동시켜 실천하는 일을 오늘의 일이 아닌, 내일의 목표로만 정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오늘의 할 일보다는 내일의 계획을 짜느라고 오늘을 쓰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봅니다. 큰 계획은 필히 있어야겠지만, 그 실천 계획은 (내일부터는) 오늘에 집중해야겠습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시간의 의미는 인내와 관찰의 지혜로 해석은 되지만, 새 열매는 사실적 목표, 선택, 그리고 사랑으로 얻게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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