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최근 게시글      최근 코멘트
[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행복과 완전을 위한 의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코러스 작성일21-11-24

본문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행복을 달성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인간의 의지를 의지 창조체의 탄생이라는 매우 특별한 의미이자, 동물에게는 없는 특권으로 말한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의 의지는 동물에는 없다. 동물의 결정 능력은 의지가 아니라 생명체로써 가지는 본능적 선택 능력이다. 지능이 높으면 선택 과정이나 모습이 복잡하고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본능적 선택이나 유전적 선택에서 벗어나는 능력이 없다. 확대해서 말하면, 식별만 가능할 뿐 판단은 불가능하다.

반려동물과 교감을 나눈다는 점 때문에 가족처럼 여기거나, 동물도 존중받을 의지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착각이다. 원시 생명체부터 고등 생명체까지, 모든 생명체에는 마음 순환 회로가 작동하고 있고 거기에서 지적 분별력과 판단 현상이 일어나고는 있지만, 의지적 기능은 없다.  

 

인간 의지는 각별한 의미와 가치와 힘이 있다. 기본적으로 발휘되는 의지의 힘은 아마도 행복의 추구일 것이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참된 행복의 기준을 달리 말하지만, 어찌 되었건 자기완성의 기쁨이고 완전에 대한 욕구가 성취되는 것이 행복이다.  

 

완전을 위한 의지의 표현이 '완전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시작점이다. 하느님의 명령을 물질세계에 한정할 것인지, 혹은 비가시적인 정신세계까지 확장할 것인지 아니면 창조가 시작되고 귀결되는 절대계에 대한 염원까지 담을 것인지 범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시간으로 비교하면, 완전을 성취하는 시간 단위가 아주 짧으면 동물 차원에서의 의지 활동일 것이고, 일생 전체를 여정으로 삼고 있다면 철학적 차원의 의지 활동일 것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시간까지 확장된다면 영원한 세계에서의 완전의 성취일 것이다.

 

유란시아 책에서 인간이 우주 아버지의 자녀임을 새삼 진리로 전하는 이유는 인간 의지의 힘에는 현실 세계의 물질적 완전은 물론이고 정신 세계의 완전과 나아가 영원한 세계의 완전까지 도약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물질적 완전, 정신적 완전이 있고 마지막으로 우주 아버지를 향하는 완전이 있다. 이 마지막 여정을 위해 의지를 보일 때, 가장 참된 가치의 위대한 의지가 된다.

 

[1:1.2]  

우주 아버지는 우주들의 지능적 의지창조체에게 독단적 인식, 형식적 경배, 또는 노예 같은 봉사를 어떠한 형태로든 강요한 적이 없다. 시간과 공간 세계들에 있는 진화하는 거주자들은─그들 스스로의 가슴 안에서 우러나와서─그를 인지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자발적으로 경배하여야 한다. 창조자는 그의 물질적 창조체들의 영적 자유 의지의 복종을 강요하거나 강제하기를 거절한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한 인간 의지의 애정 어린 전념은 하느님에게 드리는 사람이 최고로 선택할 수 있는 선물이다; 사실, 창조체 의지의 그러한 성스러운-바침은 사람이 파라다이스 아버지에게 주는 유일하게 가능한 참된 가치의 선물을 이룰 것이다.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활동하고, 존재한다; 아버지의 뜻에 머무르며-지내기 위한 이러한 선택을 제외하고 하느님에게 사람이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우주들의 지능적 의지 창조체들에 의해 내려진 그러한 결정들은, 창조자 아버지의 사랑에-지배된 본성에게 아주 만족을 가져다주는 그 진정한 경배의 실체를 이룬다."

 

가장 위대한 의지를 발휘하는 시작의 하나가 경배이다. 경배는 무조건적인 숭배나 굴종의 의미가 아니다. 의지에서 니오는 힘이 발휘하고 스스로 바치는 헌신이 필요하다. 의지의 헌신이 없는 경배는 지금까지도 잘못 알려진 동물적 두려움과 복종의 마음 작용에 불과하다. 무지하고 원시적 종교의 잔재가 인간의 의식 안에 여전히 남아 있지만, 유란시아 책은 이러한 원시적 경배에서 빛과 생명의 시대의 경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시간과 공간의 확장과 깨우침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복잡하고 바쁜 일상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당장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의지를 집중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질적 성취를 제외하고 정신적 성취만을 추구하면, 흔히 '정신 승리'라는 말로 조롱받는다. 마찬가지로 물질과 정신적 완성을 제외시킨 채 영적 성취를 추구하면 '종교에 미친 현실 기피자'로 의심받는다.  

 

사람들은 흔히 물질 다음에 정신세계가 있고 그다음에 영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현실에서 성공한 다음에 정신세계를 정복하고 그 다움에 영적 세계를 접근하려고 한다. 그러나 물질과 정신과 영은 순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동시에 실존하는 입체적 영역이다. 어떤 물질적 현실적 도전도 매 순간마다 정신적, 영적 성취가 동시에 따라붙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111:1.6]

마음은 조화 우주 악기이며, 그 위에서 인간 의지는 파멸의 불협화음을 연주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위에서 바로 그 인간 의지는 하느님 정체화 구현에서의 그리고 그에 따른 영원한 생존에서의 절묘한 선율을 연주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사람에게 증여된 조절자는 악의 영향을 받지 아니하며 죄를 받아들일 여지도 없지만, 그러나 필사자 마음은, 인간 의지의 악용에서 나오는 죄-가득한 음모들과 그리고 인간 의지의 자아-추구에 의하여, 실재적으로 뒤틀리고, 왜곡되고 그리고 악하고 추하게 되어버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마음은 하느님을-아는 인간 존재의 영으로 조명된 의지에 따라서 고결하고 아름다우며 진실하며 선하게정말로 위대하게─될 수 있다.

 

각자의 마음이 추악하게 만들어지거나 아니면 아름답고 위대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의지가 가진 힘이다. 하느님을 알던지 모르던지 둘 중의 하나처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고 추하거나 아름답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의지를 악용하거나 성스럽게 발휘하거나 각자가 정하는 일이다.  

 

의지는 과거의 체험과 미래의 예측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현재의 활동이다. 시공간의 현실적 한계로 인하여 인간 의지의 힘 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는 행복이 있을 수 있다. 의지가 유한한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유한한 한계를 초월하는 하나의 예외가 하느님, 창조자이자 통제자이자 유지자를 알고자 하는 의지일 것이다. 이 의지는 유한한 체험과 실체를 딛고 그 너머에서 하느님께 다가가는 의지이다. 이러한 초-유한적 시도가 모두에게 가능한 것은, 하느님이 직접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응답하려고 각자의 마음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성한 의지가 실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하느님의 신성한 의지가 자신의 의지 속으로 비취도록 하는 적접적인 행동이 기도이다.

 

 [144:4.9]

기도는 아이가 자신의 영 아버지를 진정으로 그리고 갈망하면서 쳐다보는 표정이다; 그것은 인간 의지를 신성한 의지와 교환하는 정신적 과정이다. 기도는 무엇으로 있는 어떤 그것을, 무엇으로 되어있어야만 하는 어떤 그것으로 바꾸기 위한 신성한 계획의 일부분이다.   


현실의 행복과 기쁨을 순조롭게 이루기 위하여 기도할 수 있고 완전을 성취하려고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자칫 스스로 성취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기도가 될 위험도 있다. 기도는 의지의 전환이지 의지의 포기는 아니다. 의지가 없이는 어떤 성취도 행복도 이룰 수 없다. 누군가 가져다주는 행복은 행복이 될 수없다. 의지의 발휘 없이 저절로 기적처럼 다가오는 기쁨은 시간 속에서 반드시 소멸된다.

 

가장 위대한 의지의 발휘는 신성한 의지와 인간 의지의 교류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적 성취를 위한 실질적 경배와 기도를 거치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것은 결코 원시적 행태의 경배와 기도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원시적 동기에서 전적으로 벗어나는 전혀 별개의 것도 아니다. 갓난아기가 현실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갓난아이 시절을 거치지 않은 어떤 사람도 의지 생명체로 존재할 수 없다.

댓글목록

로터스님의 댓글

로터스 작성일

보통 신에게 기원을 드리거나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쳤을 때입니다. 기도의 위험에서 지적된 것처럼 보통 말하는 기도는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고 하느님에게 의탁하며 처분을 바란다는 의미가 더 많을 것입니다. 유란시아 책에서 신성한 의지와 교환한다는 의미는 좀 다른데 쉽지는 않습니다.

기도가 하느님에게 다가가 소통하려는 신성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소통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여 하느님에게 계시를 받았다거나 예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듯이 무작정 다가설 수는 없지요. 91편에서 소개되는 기도의 참된 자세와 마음의 준비가 꼭 필요합니다.


 


유란시아한국 소개 문의 | 요청  (웹관리자) : sysop@urantia.or.kr © URKA 상단으로
  모바일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