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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개인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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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길손 작성일21-11-29

본문

인간관계는 개인 간의 교류나 결속을 바탕으로 합니다만, 사회의 일원으로서 집단 전체나 개인과 가지는 관계는 성격이 다릅니다. 개인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기는 하지만, 개인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참됨이나 아름다움은 집단 안에서는 새롭게 드러나기가 상대적으로 드물지요. 한편 집단에서는 개인 관계에서 찾을 수 없는 선이 새롭게 발견될 수 있지요. 그런 이유에서 유란시아 책에서는 신성한 체험을 종종 진-미-선이라는 순서로 설명하는 듯합니다.

 

개인 간의 관계는 천차만별이고 늘 변하고 또 항상 새로운 것이라서 상대적인 것이지만, 집단에서는 독자적이고 개인적 체험보다는 함께 공유해야 한다는 특징이 있어서 각자의 독자성은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가 쓴 군중 심리라는 책이 있는데, 사회를 이루는 일반 군중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밝혀줍니다. 문명을 이끄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또한 이들이 등장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바탕을 이루는 건전한 사회 구성원들이 있고 한편으로는 문명을 파괴하려는 폭력적 일반 군중이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인류 문명과 사회 현상을 설명하고 있지요.

개인의 관계에서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발전하고 창발 하는 진리와 아름다움은 각자의 지능과 감성과 영성에 따라서 눈부시게 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단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선은 개인의 ㅊ[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2:6.1
 
물리적 우주에서 우리는 신성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지적 세계에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를 식별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선함은 오직 개인적 종교 체험의 영적 세계에서만 발견된다. 그것의 참된 본질에 있어서, 종교는 하느님의 선함에 대한 신앙-신뢰이다. 철학적으로 볼 때, 하느님은 위대하고 절대적이며 심지어는 지능적이고 개인적 일 수 있지만, 종교적으로 볼 때 하느님은 또한 도덕적임에 틀림없다; 그는 선하심에 틀림없다. 사람은 위대한 하느님은 두려워했겠지만, 그러나 사람은 오직 선하신 하느님만을 신뢰하고 사랑한다. 하느님의 이 선함은 하느님의 개인성의 일부분이며, 그것에 대한 그 충만한 계시는 오직 하느님의 믿는 아들들의 개인적 종교 체험에서만 나타난다.

 

종교적 도덕적 의식이 사라진 상태에서의 단순한 군중 심리에서 본다면, 집단은 자칫 동물적 본능에 굴복하기가 쉽습니다. 집단에서는 진리나 아름다움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인정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어떤 확실하고도 현실적인 것을 우선적인 목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군중이 합심해서 어떤 참된 진리를 목표로 힘을 합하거나 추구하거나 혹은 더욱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군중이 추구하는 것은 대부분, 더욱 좋은 것에 한정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개인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고. 나아가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종교적 의식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군중을 이룬다면, 예수님이 지적하였듯이 마음을 통합하여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이익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도 하느님의 신성한 뜻이 세상에서 드러나도록 합심하여 노력을 기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신앙이 매우 깊었던 당시의 사제들과 군중들이 보인 집단의식과 행동은, 비록 현대와는 아주 다른 문명이고 의식도 개화되지 못한 2 천년 전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모습입니다. 사회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집단의 의식이나 군중 심리를 보면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집단은 결코 진리에 갈증을 느끼지 않으며, 자신의 바람이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진실이고 사실이라 하더라도 부정하거나 외면하고, 자신을 매혹시키는 것은 그것이 설사 오류나 잘못된 것이라도 기꺼이 선택하고 그것을 자신이 열정을 바칠 주인으로 삼거나 신격화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열망이나 환상을 파괴하려고 시도하는 자를 자신들에게 악을 행하는 범죄자로 여기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선을 행하고 선을 이루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진리를 깨닫고 발견하면서 따르는 대신, 순전히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 군중의 심리를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악을 멀리하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미칠 것이라고 안타까워했지요.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 군중 심리를 부추기려고, 의도적으로 악하고 거짓된 이야기를 만들어서 진실을 파괴하고 도덕은 물론 종교적 진리마저도 무력화시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집단의 호응을 이끌어내어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얻으려는 것이지요.  

 

이러한 세상의 현실을 정직하게 인식한다면, 개인 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집단의 관계까지 하느님의 진리와 뜻을 성취하는 이상적인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종교적 삶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입니다. 인류 문명이 이상향을 목표로 끝없이 발전하려면, 책에서 계시되는 새롭고 참된 종교의 의미와 본질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인공지능이 발달하고 삶이 점점 풍요로운 물질 만능시대가 되면 현실적 행복에 더욱 빠지게 되고, 전승되어온 옛 종교적 진리가 제시하는 계명이나 깨달음으로는 현실의 행복과 영원한 운명을 위한 실천적인 도전을 끝없이 발전시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구태의연한 진리에서 벗어나기 힘든 시대에는, 계시 종교가 다시 태어날 때까지는 최소한의 황금률이나 도덕적인 의식만이라도 유지되어야 하겠지요. 그러한 빛을 향애 나아가는 사회는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적극적으로 실천해야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디오니스님의 댓글

디오니스 작성일

인문학이나 철학에서는 진미선을 사람이 살아가는 도덕이나 인류의 보편적 의미로 말하고 있어서, 현실 세계의 한계 안에서 의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반하여 신학에서는 오히려 현실에서 벗어난 것만 말하려고 하고요.

유란시아 책은 진리와 아름다움이 현실에서의 신성한 실체라고 말하고 있고, 무언가 영원한 하느님과 관련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시대적 계시겠지요.

그러나 선은 사실이기보다는 상황과 같아서 개인이 실체로 이해하고 파악할 어떤 초월적인 무언가를 발견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종교적 체험이라니 더욱 그럴 것 같네요.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군중은 사색하는 속성이 없고 반응하는 속성만 었어요. 뭉치려는 본성만 있고 자제력이 없어요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사랑 넘치고 화기애애한 사람들 간의 관계가 종교 집단을 이루어 움직이면 참혹한 전쟁과 테러가 일어나고, 충돌이 일어나도록 집단의 심리를 부추기는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집단에 속하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러한 싸움에 참여하게 되지요.

의식이 깨어 있고 궁극의 선을 이루려는 결심이 있다면 진미선을 포기하지 않겠지만 대부분은 집단의 힘에 굴복하거나 집단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종교에서도 이단이라고 배척하는 일이 지금까지도 많고 성격이 비슷한 모임이나 동아리에서도 명예와 성과를 독점하려고 악의적인 모함과 비난을 합니다. 선의의 경쟁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지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양심과 도덕을 서로 자기들 시각에서 정하면서, 다른 집단을 경시하는 모습이 흔합니다. 모두 군중이 만들어내는 심리로 인한 폐단이지요.

악을 지적하는 대신 선으로 관계를 맺는 것, 악을 선으로 갚는 그러한 선의 힘을 가지려면 선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데, 선은 여럿이 있을 때만 체험될 수 있으니, 참된 선을 이루는 집단의식만이 인류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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