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최근 게시글      최근 코멘트
[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통제

페이지 정보

작성자 길손 작성일21-12-22

본문

유란시아 책의 머리말이나 1편 글에서 하느님을 처음 설명하고 정의할 때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말하며 한편으로는 통제자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진리와 "하느님은 통제자"로 우주를 통제한다는 말은 언뜻 생각해도 서로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의 경우를 생각해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순간과 통제하는 순간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자녀를 사랑하거나 아니면 통제하거나 전혀 다른 자세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통제는 사랑과는 충돌이 되는 의미입니다. 잠시 사랑을 멈추거나 잠시 거두는 행위입니다.

부모가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자녀를 대하고, 마찬가지로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자녀를 위해 통제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무리 사랑이 가득한 부모라도, 통제를 가하면 반발심이 생기거나 부담이 느끼면서, 가능한한 벗어나려고 할 것입니다. 통제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우주 만물은 하느님의 통제에 따르거나 복종해야 한다는 압박이 들어있습니다.

책에서 밝히듯이 하느님이 절대적 사랑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진리에서 하느님의 통제를 이해해 본다면, 창조계에 대한 통제는 암묵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우주 창조계나 필사자에게 압박으로 다가오거나 느껴지는 그러한 하느님의 활동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통제는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과 조금도 충돌이 되지 않는 활동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랑과 마찬가지로 통제도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밝혀내어 어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랑과 조화되는 참된 의미를 모르고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통제는 복종이자 굴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우주의 유일한 체험으로 성취하면서 상승하도록, 필사자에게 부여된 여러 하느님의 은혜에도 어긋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참된 신앙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서라도, 통제의 참된 의미를 주의 깊게 살피고 진정한 본질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통제는 영어로 control이고 통제자는 controller입니다. 한글 낱말에서 통제는 "일정한 방침이나 목적에 따라 행위를 제한하거나 제약함" 혹은 "권력으로 활동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며 영어 어원에서는 "정밀도를 측정하고, 확인하고, 맞추는 것" 혹은 "권한을 행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나 한글이나 뉘앙스에서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통제와 비슷한 의미로 조절(adjust)과 조율 혹은 규제(regulate)라는 용어가 별도의 개념으로 사용되고는 있지만, 특별한 고유 명사인 "생각 조절자"를 제외하고는 통제가 그중 가장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통제는 거의 500번 등장하는데 일상의 평범한 말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문맥을 좀 더 살펴보면 깊고 엄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는 흔히 이야기하는 통제실이나 통제 센터처럼 어떤 대상을 강제적으로 제한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영어 원어의 의미는 강제적인 제한보다는 무언가를 확인하고 목표에 접근되도록 맞추어가는 행위를 설명하는데. 이 둘의 의미는 비슷해 보이지만, 개념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한글 번역으로 보통 이해하고 느끼는 일반적인 의미보다는 영어 원어의 의미로 본문을 해석하면 오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원문이 사용하는 통제는 흔히 말하는 컨트롤러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가정의 난방기나 냉방기에 실내 온도를 맞추는 온도 컨트롤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원래 명칭은 온도제어기인데, 이 온도 컨트롤러의 컨트롤의 의미가 통제로 번역되어 개념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통제는 통제 기능이 시작되기 이전에 미리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 목적하는 설정 값이 반드시 지정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설정 값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서, 추우면 높게 더우면 낮게 지정되는 데, 어떤 상황에서도 최적의 상태를 만든다는 목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기능에서 통제는, 인위적이고 강압적이고 복종을 암시하는, 보통의 의미와는 사뭇 다릅니다.

통제는 온도 컨트롤러의 설명처럼, 어떤 대상을 바람직한 상태로 만들려는 뚜렷한 목적이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원래 목적에 완전하게 이를 때까지, 사용될지도 모르는 장치와 도구를 미리미리 준비시키고, 현실 상황에 따라 목적 달성을 위한 실질적 기준값이 정밀하게 변경될 때, 조심스럽게 필요에 따라 준비된 것들이 활용될 수 있도록 갖추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제어기 혹은 통제 장치가 하는 통제 기능이지요.

목적이 있는 활동에서의 이러한 통제를, 보통 이해하는 일방적으로 억제하고 강제하는 활동으로 해석하면, 통제의 진정한 의미가 전달될 수 없습니다. 전제되어야 할 핵심 목적이 사라진 상태에서, 통제 행위를 이해하면 독재자의 횡포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개념적으로 충돌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란시아 책에 등장하는 통제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으며, 극심한 변화가 일어나는 현실이 있으며, 그에 대응하여 필수 불가결하게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통제는 임의로 행하는 일방적인 조치가 아닙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통제를 이해하면 의미가 색다르게 돋보이는 문장들이 많이 있습니다.

111:4.9
 
사람의 이 내적 삶이 참으로 창조적이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는 이 창조성이 자연발생적이고 전혀 우연한 것이 되게 하든지 아니면 통제되고, 지도되고, 건설적인 것으로 되게 하던지 그에 따른 선택의 책임이 주어져 있다. 그것이 기능하는 무대 위에 선입관, 미움, 두려움, 분노, 복수심, 편협한 신앙들로 이미 가득 차 있다면 창조적인 상상력이 어떻게 훌륭한 자녀들을 출산할 수 있겠는가?

   

원래의 개념인, 확대된 통제의 의미에서  위의 문장을 이해하면,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하느님은 우리들이 자신과 같이 완전한 존재가 되도록 우주의 무언가를 통제하고, 지도하고, 건설적인 것이 되도록 준비했다는 것, 그리고 자유의지라는 개인이 지닌 신성한 권능 안에서 우리의 선택과 책임으로 무언가를 이루도록 현실이라는 무대가 있다는, 좀더 엄중한 의미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처럼 모든 것이 준비된 우주 현실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미 그러한 목적을 위해 통제되어 있는 우주의 모든 것을 활용한다면, 내면의 창조성이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모르거나 잘못 왜곡하여, 선악에 대한 선입관, 악에 대한 미움, 죄에 대한 두려움, 현실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 굳어버린 편협한 신앙들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신성한 명령이자 우주 목적인 완전한 존재의 실현이라는 인간의 아름다운 이상과 상상이 탄생될 수 없다면,  하느님의 아들이 되려는 그 사람의 운명에는, 아무런 창조적인 진화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통제의 의미에는 하느님의 목적과 영원히 진보하는 시공간의 우주 현실, 그리고 그 안에서 필사자 완전이라는 목적을 위해 매 순간마다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적절한 수단과 도구와 대책들이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필사자의 자유 의지와 기꺼이 내리는 결정과 선택인 것이지요. 그에 따라 창조적인 내적 삶이 펼쳐지는 것이지요.

동제를 검색하면 많은 글들이 나오는데, 의미를 확장하여 살펴볼 수 있는 문장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최극자 하느님과 관련된 문장도 조금 더 실질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필사자의 현실적 삶에 동행하며 유한한 우주를 실질적으로 하나로 합일하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가 운명적으로 다가가는 최극자 입니다.

117:2.1
 
최극자는 시간의 하느님이다; 시간에서의 창조체 성장의 비결은 그의 것이다; 미완성의 현재의 정복과 완성되는 미래의 성취 역시 그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유한한 성장의 최종적 결실은: 통합하면서 창조적인 개인성 현존의 덕분으로 영에 의해 마음을 통하여 통제되는 힘이다. 이 모든 성장의 정점에 다다르는 결과는 최극존재이다.

 

창조적 삶의 성취는 늘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하기 때문에, 어느 일정한 하나의 상황에 우리의 마음이나 인식이나 판단이 고정되거나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은 시공간으로 대표되는 유한 우주의 하느님이 준비한 잠재적 체험의 비밀이며 또한 성취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완전한 현재가 우리의 성취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가 각각의 의미를 가지면서 통합되는 그러한 성취가 결국에는 최종적 결실을 이루는 완전함의 달성일 것입니다.

그러한 통합의 능력이 개인성의 현존으로 인한 개인 간의 영적 교류로써 발휘될 수 있으며, 그 실질적인 힘이 마음을 통하여, 최극자가 통제하는 활동으로 준비한 모든 것이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개인 사이에 마음이 움직이는 매 순간마다 매 장소마다, 하느님의 통제, 곧 과거의 체험을 바탕으로 현재를 정복하고 그것으로 미래의 성취가 하나로 이루어지도록 준비되고 있는 우주 아버지의 사랑을, 창조적인 내적 삶으로 사실화할 수 있도록 마음의 방향과 목적과 의미를 통합하는 시간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통제가 하느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자 증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러한 유란시아 책의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가 자기 자신과 외부 대상에 대해 무언가를 통제한다는 개인적인 행위도, 단순히 강제적으로 자신이 정한 무언가를 위하여 자신을 비롯하여 어떤 대상을 억제하고 한정한다는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점을 살펴볼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통제하면서 살았던 삶이 완전한 필사자의 본보기였다는 글이 개인의 통제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100:7.12
 
예수는 가끔 인간적인 슬픔의 잔을 깊이 들이마시기도 하였지만, 변함없이 쾌활하셨다. 그는 실존하는 실체들에 대담하게 대면하셨고, 더욱이 왕국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으셨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열심을 통제했다; 그것이 그를 통제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일”에 아낌없이 전념하셨다. 이러한 신성한 열정이 비(非)영적인 그의 형제들로 하여금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지켜보고 있던 온 우주는 그를 온전한 사람의 본보기로 그리고 영적 삶에서의 높은 기준에 대한 최극의 필사자 헌신의 원형틀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의 통제된 열심은 확 전염되었다; 그의 연관-동료들은 그의 신성한 낙관주의를 공유하는 것에 갇히게 되었다.

통제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궁극의 목적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변화무쌍한 현실의 격동 속에서 현실에 가장 적절한 기준을 찾아서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찾아서 모든 것아 하나로 이루어지도록 일관성 있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우리가 좀 더 현실적으로 본받고 그의 삶을 살아갈 방법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현실을 넘어 우주 끝까지 펼쳐진 "아버지의 일"을 자신의 존재의 목적으로 깨닫고, 상황에 띠라 다양한 현실 삶에서의 목표를 적절하게 설정하면서 최적 상태로 만들어 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삶의 모습은 결코 현실적 타협도 아니고 현실의 도피나 거부도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어떤 현실에서도 활기 넘치는 신성한 열정으로 현재를 통제하는, 곧 자신의 목표에 즉시 최적화 될 수있는 현실을 만들어가는 삶이었으며, 그것은 주변의 영 동반자들, 그와 개인적 교류를 나누는 동료들에게 신성한 낙관주의를 실감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참된 통제는 신성한 낙관주의와 연결되며 이는 현실 타협도 아니고 무조건적인 현실 긍정도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무쌍한 현실의 모든 요소와 수단을 적극적으로 포옹하면서 그 목표를 이루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러한 삶에서는 오히려 현실적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고 '미쳤다'라고 오해받지도 모르는 비현실적 지표가 삶의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통제된 삶의 목적이 "아버지의 뜻"이 된다면, 비록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일"을 직접적으로 할 기회는 없더라도 하느님의 통제의 뜻을 온전히 따르고 지키려는, 또 다른 하느님의 일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우주를 영원한 우주로 진보시키는 신성한 목적이 실현되도록 모든 것을 통제하여, 진보의 단계마다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하는 우주 아버지의 사랑과 그로 인해 우리에게 증여된 신성한 영의 활동들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화에 맞추어서, 모든 것이 통제되어 준비를 갖춘 우주의 힘과 에너지와 공간체들이 완전을 향한 우주의 행진을 위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주 아버지의 사랑과 통제는 모두 우리를 향해 펼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하느님의 신성한 통제는 우주 전체가 결국에는 창조하신 뜻을 이룬다는 절대 원칙에서 그나마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만, 예수님이 자신의 열심을 통제한 문장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깨닫고 결정하신 일생의 목적과 그 목적을 달성하시는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고서는 이해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통제에 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었기에, 스스로의 일생의 목적을 찾을 수 있었다고 짐작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문이 예수님 스스로 하늘에서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깨닫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하느님의 통제를 깨닫거나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았던 통제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저마다 일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위하여 신성한 열정으로 전념해야겠지요. 일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을 하는 목적을 먼저 중요시해야 하는데, 일의 귀천을 따지는 현실에서는 쉽지는 않습니다.

유란시아 책이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세세한 진리들을 계시하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주는 것 같습니다.

사트바님의 댓글

사트바 작성일

어려운 내용이라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만, 통제를 차라리 컨트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받아들이기 쉬울 것 같습니다. 한글이 주는 강제성이 마음에 걸리네요. 통제에 필연적으로 연상되는 말이 힘인데, 힘이 신성의 표현 방식이라는 머리말의 정의처럼, 힘도 보통의 개념에서 벗어나야만 통제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대에 와서 새롭게 조명되는 니체라는 철학자가 핵심으로 주장하는 "힘에의 의지"도 힘에 대한 해석이 다양해서 파편으로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니체의 경우에서도, 통제에서 행사되는 힘의 존재를 인간이 정의하고 인지하고 상정하고 창조하여 발산되는 인간적 실체로 보려는 시도 자체가 위버멘쉬 개념을 흐리게 만드는 함정이 되는 것이지요. 신이 죽었다는 말이나 초월 자체를 무대에 도입하기를 거부했던 그의 초월에 근접된 몸부림은 아마도 유란시아 책에서 유한의 정점으로 말하는 최극이겠지요. 위버멘쉬는 최극인으로 정의됩니다. 물리적 유한과 초월의 경계선에 있는 존재이지요.

컨트롤의 근원이자 중심은 변함없이 우주 아버지의 사랑이겠지만, 그 실체의 중심에는 최극 존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최극 존재에게 사랑을 보여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만 대신, 역동적 잠재성이 될 수 있도록 통제의 힘을 더욱더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행사해 달라고 탄원하고 싶습니다. 인간 힘으로 통제가 안 되는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서요.


 


유란시아한국 소개 문의 | 요청  (웹관리자) : sysop@urantia.or.kr © URKA 상단으로
  모바일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