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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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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새 작성일22-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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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면 한해의 일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자세를 가다듬어 본다.
그런데 왜 이때가 되면 잠시나마 자신을 되돌아 보는 그런 철학자와 같은 생각이 스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은 본질적으로 알게 모르게 자기 자신을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전문 용어로 자아 완성이라고 정의하기도 하지면, 글자를 깨우치지 못한 어린아이 시절부터 모든 것을 깨달은 현자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이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릴 적에는 부모의 사랑으로 자신을 확인하면서 자기가 누구인지 조금씩 알아가고, 성장하면서는 학교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가정을 다시 만들면서 친구나 가족이나 타인과의 수많은 일상의 사건과 반응을 통하여, 자기가 누구인지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며 자신을 알아간다. 그리고는 자신을 내세우기도 한다.

예수는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자신을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물론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전제하는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도 자기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와 가치와 그 본질을 알지 못하면 그 어떤 세상의 지혜도 헛된 것이며, 오히려 그러한 잡다한 모든 지식과 지혜가 스스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가 된다는 진리를 밝히신 것이다.

그렇게 삶이란 결국 일생을 통하여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이라서, 고비마다 자신의 돌아보고 마무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연말에 울려 퍼지는 올드랭사인의 노래가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알고자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때문이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자신을 알고자 하는 존재의 본성이다.

이런 근원적 본성이 잘못된 경우가 없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자아 완성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성범죄자,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조직폭력배와 같은 범죄자들에게는 정상적인 자아 완성이라는 본질적 추구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존재는 단지 동물적 본능의 필수가 되는 동물적 자신을 인지할 뿐이다. 거기에는 인간 존재로서의 자아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본능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자아는 존재할 수가 없다.

동물적 본능이 아닌 사회적 관계에서의 갈등으로 일어나는 범죄는 그것이 실재적이건 잠재적이건 모두 일시적인 것이라고 연말이 되면 더욱 절실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스스로 새롭게 살아야겠다는 신념을 다지곤 한다. 아무튼 핵심은 존재하고 있는 현실과 삶, 그 자아의 완성이다. 이것을 고급지게 말하고 집중하여 다루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에서의 질문을 크게 나누면 세 가지이다.
첫째로 인간 존재의 본질과 가치는 무엇인가-이것이 철학의 존재론이다.
두 번째로 존재는 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철학의 인식론이다.
마지막으로 존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것이 철학의 가치론 혹은 윤리학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해석하고 풀어가는 방법에서 형이상학 형이하학 관념 이성 현상 유심론 유물론과 같은 수많은 범주로 세분화되어 나타나고 분야별로 정리하기도 하지만, 질문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로마에서 만난 스토아 철학의 지도자에게 본질에서 벗어난 철학적 가치 추구와 그에 따른 현실의 갈등과 문제를 지적한 글이 있다.

[132:1.2]

참된 가치관의 기준은 영적 세계에서와 영원한 실체의 신성한 차원들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상승하는 필사자에게는, 저급하고 물질적인 모든 기준들은 과도기적이고, 부분적이며 열등한 것으로 인지되어야만 한다. 과학자들은 물질적 사실들의 관계성을 발견하는 데에, 그렇게 나름대로 국한된다. 기술적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이 물질주의자나 혹은 이상주의자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는데, 이는 그렇게 주장하는 태도의 일부 또는 전부가 바로 철학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그가 진정한 과학자의 태도를 져버리는 것으로 가정했기 때문이다.

[132:1.4]

물질적인 과학자와 극단적인 이상주의자는 항상 치고받으며 다투게 되어 있다. 이것은 높은 도덕적 가치와 영적 시험 차원의 상식적 기준을 소유한 저들 과학자와 이상주의자에게는 참말이 아니다. 모든 시대에서, 과학자들과 종교가들은 인간에게 필요하다는 심판대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여야만 한다. 그들은 인간의 진보를 이루는 봉사에 더욱 더 헌신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속적인 생존을 정당화하려고 용감하게 분투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 서로간의 모든 전쟁을 피해가야만 한다. 만약에 어떤 시대의 이른바 과학이나 종교가 거짓되다면, 좀 더 진실하고 좀 더 가치 있는 질서의 물질적 과학 또는 영적 종교가 창발하기 전에 그것들의 활동들이 정화되거나 아니면 사라져야만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잡다하게 세분되는 범주에 빠져서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이 마치 자아 완성이라는 본질적 질문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자아를 상실하도록 오도하는 사이비 철학자가 많다 보니 세계는 점점 더 혼동되고 참된 실체는 도무지 발견되지 않는 철학적 암흑시대로 빠지고 있다. 더구나 초월적 이상으로 하느님을 빙자하는 사이비 종교가들이 현실을 부정하도록 이성을 마비시키는 범죄를 저지는 사태도 일어나고 있다. 무어라 설명할 말이 없는 인간 오만의 극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존재가 일으키는 현상의 결과에서 존재의 본질을 발견했다고 외치는 어처구니없는 반이성주의가 과학적 철학으로 포장되어 출현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있다. 이것은 거의 인간 가치의 종말을 외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다.

 

그러나 아무리 혹세무민의 시대이고 종말로 이끈다 해도, 자아 의식을 가진 정상적인 사람들은 잘못된 철학 신학 과학의 인간 진리를 믿거나 빠져들지는 않는다. 물론 자기 도취라는 반사회적 유아독존의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결국은 자아 완성을 그 나름대로 이룬다.

자아 완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아실현이다. 그리고 자아실현은 만약 창조자가 있고 그로 인해 만물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창조자의 뜻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자아실현은 자연적으로 초물질적 초현상적 초공간적 초시간적 의미와 가치를 자신을 설명하는 요소로서 추구하고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완성한다. 그럼에도 자아실현이 실천이 되지 못하고 생각에서 일어나고 생각에서 사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왜 그런 것일까.

[132:3.3]

사람은 과학을 결정화하고, 철학을 정형화하며, 진리를 독단화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왜냐하면 삶에 있어서의 발전적인 투쟁에 적응시키는 일에 정신적으로 나태하고, 또 한편으로는 미지의 것에 대해 끔찍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사람은 자신의 사고의 습관이나 자신의 삶의 기법들에 변화를 시도하는데 있어서 둔하다.


철학이라는 말은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인데, 이때의 사랑은 사랑을 느끼는 감상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행동이다. 인간 지혜의 정점에서 영적 가치의 문이 열리고 철학의 행동에서 영적 실천의 싹이 트고 결실을 이루게 되어 있다. 철학은 고도의 지식이나 깊은 생각이 아니다.  

 

연말에 진지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그리고 더욱 진지하게 자신을 발전시키려는 의식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이 살아있는 참된 철학이다. 그 철학이 하느님의 신성한 사랑과 닿을 때, 일생의 목표인 그 끊임없이 추구하는 자아 완성의 실천이 실질적으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아쉬움만이 ​매년 반복되지 않아야만 한다.

사랑은 느낌이 아니다. 매 순간 행동하는 원인이자 실천해야 하는 목표이다. 그 사랑의 힘이 신성한 진리에서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고 이끌어주고 실제로 얻는 유일한 방법은, 과학과 철학과 종교적 신앙이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을 때이다.   

그리고 사람이 우주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음을 삶을 통하여 점점 더 명백하게 체험하고 확인할 때이다.

 

댓글목록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인간 본성의 좋아하고 싫어하고 반복함을 불교 철학은 탐친치라 말해요. 품지 못하고 벗어나려는 한계에 있어요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철학이나 종교나 진화에서 한계에 이른다면 불가피하게 퇴행을 겪거나 세속화될 수밖에 없겠지요. 시공간을 모두 아우르는 참된 진리를 모르면 신비주의로 빠지거나 현세적 행복을 계속 만족시키고 위안을 주는 이야기를 찾아다니겠지요.

새해에는 유란시아 계시가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실감할 수만 있다면 혼란과 갈등에서 방황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동안 진리라는 말이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무겁고 부담되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아서 스스로 갈증을 일으키기 전에는 다가갈 기회가 없겠지요. 예수님도 마음이 준비가 안된 사람에게는 진리가 전달될 방법이 없다고 했었지요. 그래서 산상수훈이라고 알려진 팔복의 말씀이 지금까지도 큰 진리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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