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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실재성과 절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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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트바 작성일24-01-06

본문

일체유심조는 부인될 수 없는 불멸의 진리입니다. 또한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상의 삼법인 또한 부처님이 진리를 깨우친 순서이자 부처임을 체득한 유일한 법이자 불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현대불교나 티베트불교나 자이나교나 아니면 힌두교나 무한 영원의 우주 실체를 설명하는 용어가 무엇이든지 그 과정은 초월계에 대한 자각, 현상계의 실상, 초월계와 현상계의 참된 관계를 깨닫는 것이 핵심 진리인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때로는 무상의 진리를 화두로 삼고, 혹자는 개고의 진리를 평생 설파하고, 결국에는 무아의 진리를 스스로 참문하며 열반적정의 길로 정진하기도 하지만, 결국 부처님이 깨우친 일체가 순차적으로 하나로 연결되는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사는 실존인가의 여부에 대한 질문에서 불교의가 기원되었습니다. 지금도 생사가 궁금하면 생사가 있는 것이고 궁금하지 않으면 생사는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궁금증이 있어야 하고 궁금증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 유란시아 책의 진리입니다.

고집멸도에 대한 무감각이 바쁜 현대인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무명에서 행과 식으로 일어나는 연기의 법은 알거나 모르거나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법칙입니다, 이 존재의 법칙을 없다고 부인하거나 원래 공하다고 인식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상념은 질문을 부인하는 것이라서 딥을 찾은 것과는 다릅니다. 답을 모르면 일체개고를 숙명으로 여기고 제법무아의 적정을 열반이라고 왜곡하게 됩니다. 세간의 분별이 망념이고 무명망심을 심멸법멸의 해탈이라고 스스로를 속입니다.​.

유란시아 책은 세간과 불세간의 분별이 망념이 아니라 진리임을 선언하면서 시작됩니다. 일체에서 기원되어 일체로 귀결되는 영원 무한의 순환계를 명징하게 밝힙니다. 3 아승지겁도 아니고 진여실상을 일체개공과 혼동하는 논리의 함정에서 벗어나도록 길을 열러 줍니다.

흔히 유심이나 유색이나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을 인연론이며 연기론이며 하며 그 결과를 저마다 해석해 왔지만, 대상이 존재하지 않은데 무슨 마음의 발현이 시작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못합니다. 상이 있어야 마음이 드러나고 마음이 있어야 상이 드러나는데, 불성이 마음으로 구분되는 이유를 유심과 유색은 지금도 서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분별 이전과 이후의 무량청정심의 진여가 원래 자리임을 비로소 알았다고 해도 일체지와 무념의 공한 근원은 어떤 근거에서 념과 상을 동시에 내재하는지, 공과 불성의 관계가 불명합니다. 불성의 본래 속성이 공하다는 해석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체유심조의 마음이나 본래의 무량청정심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논리적 모순을 무명으로 버티려는 자성의 왜곡이 될 것입니다.

유란시아 책은 이 한계에서 밝은 길을 열어 줍니다. 절대심은 절대체에 대한 필연적이고 자동적인 발현이라고 말합니다. 경전에서는 불행하게도 절대라는 개념이 없고, 열반의 경지와 관계가 있다는 추측만 가능하기 때문에, 유란시아 계시를 이해하기에 역부족입니다. 단지 무한한 공과 무시무종이 근원하는 곳이 있다는 논리적 이해로 만족해야만 합니다.​

56:2.2
마음은 무한한 영의 기능적 자질이며, 그러므로 잠재에서 무한하고 증여에서 우주적이다. 우주 아버지의 시원적 생각은 이원적(二元的) 표현으로 영원화 된다; 바로 파라다이스 섬과 그리고 그의 신(神)이 동등하게 영적인 것, 곧 영원한 아들로 영원화 된다. 영원한 실체의 그러한 이원성(二元性)은 마음 하느님, 무한한 영을 필연적으로 만든다. 마음은 영적 실체와 물질적 실체 사이의 통신에서의 필요불가결한(불가피한) 통로이다. 물질적 진화 창조체는 마음의 사명활동에 의해서만 내주하는 영을 착상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무한한 영이 필연적이라는 설명이 절대 마음의 근원이 필연적임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연기도 아니고 인연도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전변설이나 적취설의 근원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단일 법성의 마음은 오직 인간의 마음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우주심도 아닙니다. 우주 삼라만상에는 절대에서 기인되는, 절대적 무아에서 기인되는, 그리고 절대적 실체에서 기인되는 우주 본래의 마음이 있습니다. 법성은 에너지가 아니지만 그 용법은 기능자입니다. 기능적 자질이라는 설명은, 일체유심조라는 불교 개념과 현상적으로는 비슷하지만, 기원과 달성에서 아주 다릅니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마음의 본질은 욕망입니다. 이 자아의 마음은 소유적인 욕망으로 나뉘고, 무아의 마음은 존재적인 욕망으로 나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욕망을 우리는 에너지의 힘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벗어나는 마음이 아니라 성취하는 마음입니다. 정제된 단일 욕망은 인간의 소유적 탐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힘의 생기로서 무한 공간에서 자발적으로 떠오르는 기능자로서의 마음의 결정체입니다.

우주에는 변하지 않는 법체가 있습니다.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 본래의 체로서 비어 있으면서 가득 차있는, 오직 마음으로 인식되고 분별되는 참된 실체들의 집합소입니다. 마음이 소모될 수 없는 에너지로서, 법체의 도와 덕을 깨우치며 결집되고 있을 때, 진정한 공의 차원은 더 넓게 더 참되게 초월적 실체로서 다가올 것입니다.​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불교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개념을 부처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유란시아 책에서의 절대자는 완전히 별개의 차원으로 여겨집니다. 유란시아 책에서는 상대적인 세계에서는 절대자의 존재 방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념적으로는 절대적 존재가 인간의 이해 내에서 정의되거나 존재할 수 없겠지요. 다만 생각조절자가 절대자의 단편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융합이 절대자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만약 불교가 유란시아 책에 나오는 절대자에 대한 계시를 받아들이고 이것이 기존의 불교의 진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면, 불교는 아마도 현존하는 어떤 종교보다 진리에 대한 논리적 인식이나, 실천이나, 운명 성취에 있어서 뛰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란시아 책에서 불교의 미래를 가장 기대하고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불교에서는 영(spirit) 개념이 없어요. 이 치명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 근원에 접근이 불가능해요.

우현님의 댓글

우현 작성일

불교의 위대함은 유란시아 책에서 계시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모든 전통 종교들은 인간의 지혜로 해석하는 진리와 교리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어서, 저마다의 해석 때문에 필연적으로 분파가 있습니다. 동일한 종교에서 여러 종파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개념과 지혜를 초월하는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부인하는 것이지요.

어느 종교나 진리도 저마다의 인간 해석을 고집하는 편협함을 버리고 참된 영적 세계에 대한 인식의 공통점들 발견하고 공감하고 그 바탕 위에서 하나로 단합하는 의식 개혁이 선행되어야만 유란시아 계시가 비로소 빛이 되어 모든 것을 밝혀줄 수 있습니다. 어떤 진리도, 인간의 해석이나 주장으로 조직화될 때, 반드시 탐욕과 거짓과 교만과 시기의 진리 파멸이 뒤따라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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