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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 책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의지의 존엄과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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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너킥 작성일24-03-30

본문

모든 생명체의 삶은 저절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인 의무가 있고 이 의무적 행동에는 반드시 즐거움과 쾌락적 자극을 제공하여 생명 유지의 의미를 매우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모든 것에 우선하여 실천하도록 되어 있다. 동물들이 먹이를 찾는 것은 배고픔의 고통 때문이기보다는 즐거움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동물의 감각은 생명의 파괴를 피하도록 만드는 아픔과 유지하게 만드는 쾌락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중간에 파괴에 가능성에 대한 그리고 유지의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


생명 유지와 파괴 위험에 관계된 수많은 상황과 자극에 반응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중간에서 모든 것을 연결하는 시스템이 마음이다. 감각은 물론이고 판단을 일으키는 지능조차도 마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아마도 이러한 구조는 생명운반자들이 물질 생명체의 설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기능으로 설계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동물과 전혀 다르다. 동물에서 진화하였기에 고통과 즐거움이 생명 파괴와 유지에 연관되어서 강력하고 근원적 본능이자 동인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등장하면서 이 동물적인 판단과 행동에만 활용되는 마음 시스템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되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동물성의 마음 시스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비로소 최초의 인간이 탄생되었다고 선포될 수 있었다. 이것을 유란시아 책에서는 의지 존엄의 마음의 등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62:7.3

“유란시아에 있는 생명운반자들에게─인사의 말을 전한다! 의지 존엄의 마음이 유란시아에 실존하게 되었다는 신호가 네바돈의 본부에 등록된 것을 축하하면서 구원자별과 에덴시아 그리고 예루셈에 큰 기쁨이 넘치고 있음을 확실하게 전한다. 그 쌍둥이들이 북쪽으로 도피하고 그들의 열등한 조상들로부터 그들의 자손을 격리시키려는, 목적의식이 있는 결정이 감지되었다. 이것은 유란시아에 있어서 첫 번째의 마음의 결정─인간 유형의 마음─이었으며, 이를 인정하는 이 첫 메시지가 전달되는 통신 순환회로를 자동적으로 설치한다.”


유란시아 책 62편과 63편에서는 동물과 전혀 다른 차원으로 구분되는 인간 마음을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핵심은 외부 환경이나 본능적 욕구에 무조건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실존을 위하여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동물과 다른 최초의 특징이자 가장 강력한 표식이 의지의 존엄성이다. 그런데 바로 이 인간 존엄성이라는 특징 때문에, 인간은 동물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복잡한 고통을 새롭게 인식해야만 하는 역경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만물을 지배하는 특권을 누리는, 최소한의 비용일 것이다.


가장 큰 역경은 한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유한을 벗어나려는 의지의 존엄까지 있지만, 동시에 유한을 벗어날 수 없음도 인식한다는 것이다.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강제적 상황에서 고통을 겪는다. 누구든 명령을 받고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다. 웬만한 사람들은 상항에 따라 이를 잘 해석하고 이해하고 적응하지만, 의지의 존엄이 극히 강할 때는 치명적인 고통이 되기도 한다. 인류 문명과 역사의 파도는 대부분 정복과 복종과 의지 존엄의 다툼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존엄한 인간에게 우주 아버지가 명령했다. 생명을 잘 지키면서 행복하고 기쁘게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냥 알라서 잘 살라는 명령이 아니다. 명령이란 무언가를 하라고 강요하는 것인데, 절대자들의 절대자인 우주 아버지는 우리에게 '완전하라'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완전한 것인지 모른다. 혹자는 이 명령이 유한을 벗어날 수 있는 그런 삶을 선택하는 상징적인 의미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한한 세계의 유한한 존재가 당장 성취할 수 없는 '미래의 완전 삶'을 명령으로 주었다면 '완전하라'가 아닌 '완전을 이루어가라'의 명령이어야 마땅하다. 완전을 이루어 가는 것과 완전한 것은 의미가 다르다. 하나는 진행형이고 하나는 완성형이다. 우주 아버지의 명령은 말 그대로 현재 완성형이다. 민약 그렇다면 우리는 완전히 무엇인지 모른다. 그 명령을 따르는 유일한 해석은, 모르면 모르는 대로 완전해야만 한다는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1:0.5

유란시아의 필사자들은 무한적 감각에서 볼 때 완전해지기를 도저히 바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존재들에게는, 이 행성에서 그들이 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무한한 하느님이 필사 사람을 위해 마련한 숭고하고도 신성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그들이 이 운명을 성취할 때, 자아-실현과 마음 달성에 속하는 모든 면에 있어서, 그들은, 하느님 자신이 그의 무한하고 영원한 구체에서 그러하듯이 신성한 완전성인 그들의 구체에서 그렇게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완전성은, 물질적 감각에서는 보편적도 아니고, 지적인 파악에서 무제한적이거나, 혹은 영적 체험에서 최종적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의지를 가진 신성, 개인성 동기부여의 완전성, 하느님에 대한-의식의 모든 유한한 측면에 있어서는 최종적이며 완벽하다.

1:0.6

이것이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들도 완전 하라.”라는, 신성한 명령의 진정한 의미로, 이는 필사 사람이 더욱 더 높은 차원의 영적 가치와 참된 우주 의미들을 달성하도록 하는 길고도 황홀한 투쟁에서 앞으로 나가도록 계속 촉구하고 그리고 그를 안쪽으로 손짓하여 부른다. 우주들의 하느님을 찾기 위한 이 숭고한 탐구는 시간과 공간에 속하는 모든 세계들의 거주자들의 최극의 모험이다.


의지 존엄의 존재에게는 어떤 명령도 기꺼이 따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우주 아버지의 명령이 '의지를 가진 신성'에서 최종적이라고 선언해도 긴 투쟁이지만 황홀한 투쟁이라고 손짓해도, 무작정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동물이라면 다르겠지만, 인간에게는 명령은 어떤 것이든 기꺼이 따를 수가 없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생사여탈권이 맡겨진 자에게 불가피하게 충성하는 경우일 것이다. 그 외의 모든 생명의 유지와 파괴는 생명체에게 맡겨진 고유 영역이다. 그럼에도 절대자에게 생사여탈권이 있으니 무조건 복종하겠다고 결정한다면, 동물의 논리적 망상의 결론일 뿐, 의지 존엄의 결정은 아니다.


그러나 명령한 자를 진정으로 존경하고 그에 대한 충성심이 있다면 복종은 의지의 존엄과 모순되지 않는다. 충성은 상위자에 대한 존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한 헌신이다. 충성이 하위자가 보내는 존경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상위자의 태도에 따라서 적대감으로 바뀔 수 있는 거짓된 존경이다. 진정한 존경은 상위자가 보내는 존경에서 싹트고 성장한다.


인간 의지의 존엄이 등장했을 때, 우주에서 보내온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존경이 담겨있다. 의지 존엄은 그 자체로 존경받고 있기에, 의지의 헌신과 충성은 복종이 아니다. 우주 아버지의 '완전하라'는 명령은 인간을 존중하고 의지의 존엄을 선포한 우주 창조자의 메시지에서 강요가 아님이 밝혀져 있다. 오히려 명령을 받을 수 있다는 선택적 특권으로 기쁨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완전하라는 미래의 명령이기보다는, 매 순간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만의 미래를 시작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이자, 진정으로 황홀한 모험에서 투쟁하고 있음을 우주 아버지가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하는 말이기도 하다. 명령을 하고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면 명령을 내릴 이유가 사라지고, 명령은 이행할 의무도 없어진다. 우주 아버지는 절대자이기에 헛 말을 결코 할 수가 없다.  

 

의지 존엄의 생명체 탄생에서 유란시아 행성에 보내온 네바돈의 메시지는 창조자 미가엘의 사랑과 기쁨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마가엘은 필사자로서의 증여의 삶을 유란시아의 예수님으로 어린아이로 탄생하여 하느님에게 인간을 계시하고 인간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계시하는 삶을 살았다. 그 영광의 삶은 우주에 새로운 진리의 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의지의 존엄과 충성
 

댓글목록

최경곤님의 댓글

최경곤 작성일

이번 일요일이 교회에서 축하하는 예수님의 부활절인데 그림이 잘 어울리네요. 유란시아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종교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겠지요. 예수님은 사람을 인간의 존엄성으로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그의 사랑을 완전한 사랑이라 말합니다.

사람이 동물적 본능에서 자유롭지는 못 하지만, 요즘 보는 일상의 뉴스나 인터넷 영상을 보면 안돈과 폰타의 지혜에도 못 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저기 이기적 본능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많아서 눈을 돌리곤 합니다.

자기 이익과 영광을 위하여 타인의 결점이나 약점을 찾아 공격하고, 자기 출세와 명예를 얻으려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성을 버리면서 진미선을 추한 것으로 버젓하게 전도하는 모습을 보면, 의지의 존엄성이 남아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이 유란시아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면, 미래의 밝은 희망은 언제 나타날지 궁금합니다.

토파즈님의 댓글

토파즈 작성일

인간 존엄은 생각 조절자 덕분이에요. 의지가 존엄해도 의지를 둘러싼 생존 본능과 마음이 스스로를 속여요.

네오님의 댓글

네오 작성일

의지의 존엄성은 상승하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것이라서 유란시아 책에서도 우리를 다시 깨우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존엄이라는 말은 아마도 원시 시대에 절대적 권위를 가진 신과 왕에게 복종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의미로 이야기하는데 유란시아 책에서는 생명의 존엄 같은 그런 일반적인 의미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유엔에서 선포한 세계 인권 선언의 제1조가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비록 천부적으로 부여된 존엄성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선포일뿐입니다. 지켜야 한다는 개념은 있지만 신성하다는 개념과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유란시아 책에서의 존엄은 신성하다는 의미가 함께 들어있어서 유란시아 자체를 위한 사회적 질서나 도덕적 법칙보다 훨씬 높은 의미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준 복음은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존엄성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이 진리의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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